사단법인 대한불교청년회
만해 한용운 대선사 연보
1879. 08. 29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의 차남으로 출생
1905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됨
1910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여 불교개혁을 주창함
1917
설악산 오세암에서 참선 중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남김
1918
월간 종합교양잡지 《유심》을 창간함
1919
3·1운동을 주도하여 독립선언서에서 행동강령으로 공약삼장을 첨가하고 3월 1일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 선언 연설을 함. 옥중에서 《조선 독립에 대한 감삼의 개요》를 발표
1923
민립대학설립 운동을 주도하고,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
1924
조선 불교청년회 초대 총재에 취임
1927
항일민족통일선선체인 신간회를 창립·발기하여 중앙집행위원겸 서울지회장에 피선 됨
1930
항일 청년 승려 비밀결사 만당의 영수로 추대됨
1933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하여 서울 성북동에 북향집 심우장을 짓고 주석
1940
창시개명 반대운동 및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 운동 전개
1944. 06. 29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
1962. 03. 01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음
만해 항용운 대선사 행장
전기(1879년 ~ 1908년) : 수학수도 30년
1879. 08. 29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의 차남으로 출생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한학을 익히며 의인결사의 꿈을 키움
1896(18세)
의병에 참가함
1897(19세)
의병의 실패로 몸을 피해 고향을 떠남
1899(21세)
의병항쟁 시도 후 법주사를 거쳐 설악산 입산수도(불목 노릇을 하며 근대서적을 접하다.)
세계 여행을 계획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세계사의 큰 변화를 파악하였으나 위기를 당하게 되어 다시 돌아와 홍서 집에 머묾(보국 태어남)
1905(27세)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됨. 연곡스님에게 득도하고 영계스님에게 수계 받음(계명은 봉완,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
1908(30세)
일본 조동종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공부하고 측량학교를 개교
중기(1909년 ~ 1932년) : 불교 개혁·민족항쟁의 주체로 25여년
1909(31세)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 취임
1910(32세)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여 불교 개혁을 주창함
박한영, 진진웅, 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한일불교동맹조약체결을 분쇄함
범어사에서 조선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하여 조선 임제종 관장에 취임
1911(33세)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해 만주로 망명, 독립군에게 독립사상을 돋우어 주고 독립지사들을 만나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
1913(35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간하여 불교의 개혁을 부르짖음
1914(36세)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범어사에서 《불교대전》을 발간
1917(39세)
설악산 오세암에서 참선 중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남김. 정선강의 《채근담》 발간
1918(40세)
월간 종합 교양잡지 《유심》을 창간
1919(41세)
3.1운동을 주도하여 독립선언서에 행동강령으로 공양3장을 첨가하고, 3월1일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함. 옥종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발표
1920(42세)
투옥 중 일제가 3.1운동을 회개하여 참회서를 써내면 사면한다고 회유했으나 이를 거부
1920. 6. 20
대한불교청년회 전신인 조선불교청년회 창립
1922(44세)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불교계 쇄신을 선도하며 법보회 발기
1923(45세)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하고,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
1924(46세)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청년회 초대 총재에 취임
1926(48세)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발행
1927(49세)
항일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를 창립 발기하여 중앙집행위원겸 서울지회장에 피선됨.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총동맹으로 개편하여 불교의 주체화와 대중화에 선도적인 역할을 함
1930(52세)
항일청년승려 비밀결사 민당의 영수로 추대됨
1932(54세)
일제의 사주를 받은 식산은행이 일본화 정책으로 조선 인사를 매수하기 위해 스님에게 성북동 일대의 국유지를 주겠다고 했으나 이를 거절
후기(1933년 ~ 1944년) : 심우장 시대 10년
1933(55세)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하여 서울 성북동에 북향집 심우장을 짓고 주석. 유씨와 재혼하여 딸 영숙을 낳음
1935(57세)
신문연재소설 《흑풍》 발표
1936(58세)
신문연재소설 《후회》 발표
1937(59세)
휴간되었던 《불교》 지를 속간함
1938(60세)
《불교청년운동을 부활하라》 를 《불교》 신집에 발표
1940(62세)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전개
1943(66세)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
1944(67세)
6월 29일(음력 5월 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를 거친 후 동지들에 의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됨
1962. 03. 01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음
1879. 08. 29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의 차남으로 출생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한학을 익히며 의인결사의 꿈을 키움
1896(18세)
의병에 참가함
1897(19세)
의병의 실패로 몸을 피해 고향을 떠남
1899(21세)
의병항쟁 시도 후 법주사를 거쳐 설악산 입산수도(불목 노릇을 하며 근대서적을 접하다.)
세계 여행을 계획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세계사의 큰 변화를 파악하였으나 위기를 당하게 되어 다시 돌아와 홍서 집에 머묾(보국 태어남)
1905(27세)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됨. 연곡스님에게 득도하고 영계스님에게 수계 받음(계명은 봉완,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
1908(30세)
일본 조동종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공부하고 측량학교를 개교
1909(31세)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 취임
1910(32세)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여 불교 개혁을 주창함
박한영, 진진웅, 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한일불교동맹조약체결을 분쇄함
범어사에서 조선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하여 조선 임제종 관장에 취임
1911(33세)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해 만주로 망명, 독립군에게 독립사상을 돋우어 주고 독립지사들을 만나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
1913(35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간하여 불교의 개혁을 부르짖음
1914(36세)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범어사에서 《불교대전》을 발간
1917(39세)
설악산 오세암에서 참선 중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남김. 정선강의 《채근담》 발간
1918(40세)
월간 종합 교양잡지 《유심》을 창간
1919(41세)
3.1운동을 주도하여 독립선언서에 행동강령으로 공양3장을 첨가하고, 3월1일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함. 옥종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발표
1920(42세)
투옥 중 일제가 3.1운동을 회개하여 참회서를 써내면 사면한다고 회유했으나 이를 거부
1920. 6. 20
대한불교청년회 전신인 조선불교청년회 창립
1922(44세)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불교계 쇄신을 선도하며 법보회 발기
1923(45세)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하고,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
1924(46세)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청년회 초대 총재에 취임
1926(48세)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발행
1927(49세)
항일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를 창립 발기하여 중앙집행위원겸 서울지회장에 피선됨.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총동맹으로 개편하여 불교의 주체화와 대중화에 선도적인 역할을 함
1930(52세)
항일청년승려 비밀결사 민당의 영수로 추대됨
1932(54세)
일제의 사주를 받은 식산은행이 일본화 정책으로 조선 인사를 매수하기 위해 스님에게 성북동 일대의 국유지를 주겠다고 했으나 이를 거절
1933(55세)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하여 서울 성북동에 북향집 심우장을 짓고 주석. 유씨와 재혼하여 딸 영숙을 낳음
1935(57세)
신문연재소설 《흑풍》 발표
1936(58세)
신문연재소설 《후회》 발표
1937(59세)
휴간되었던 《불교》 지를 속간함
1938(60세)
《불교청년운동을 부활하라》 를 《불교》 신집에 발표
1940(62세)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전개
1943(66세)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
1944(67세)
6월 29일(음력 5월 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를 거친 후 동지들에 의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됨
1962. 03. 01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