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이 지난 10월부터 매달 지면평가를 공개적으로 받습니다. 잘한 것은 잘한 대로,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평가를 받고자 합니다. 따끔한 비판을 약(藥)으로 삼아 품질 높은 신문을 만들려는 취지입니다. 독자 제현들의 깊은 관심과 격려, 그리고 경책을 기다리겠습니다. 불교신문 지면에 대한 다양하고 솔직한 의견을 매달 25일까지 200자 원고지 8매 분량 이내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독자들의 다양한 기고도 환영합니다. opinion@ibulgyo.com

‘한 장의 불교신문은 한사람의 포교사’라는 말이 있다. 신문의 기능 중 하나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드러내어 독자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좋은 일은 널리 알려 기쁨을 나누고, 좋지 않은 일은 경책을 통해 바로 잡히게 한다. 기사 한 줄, 사설 한 마디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교계의 대표적 언론매체로써 불교신문이 불교계에 미치는 영향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렇게 불교신문은 때로 자비의 관음보살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파사현정의 기치를 높이 든 호법신장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불교신문이 그 소임을 무겁게 여기지 않을 때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11월 5일자(제2765호)는 총무원장 스님이 로마 가톨릭 교왕 베네딕토 16세가 주관한 ‘세계평화 기도의 날’ 행사에서 행한 연설 소식을 전하고 있다. 1면에 관련 머리기사와 ‘조계종 위상 세계에 드높이다’라는 제하의 사설을 내보냈다. 사설은 “전 세계에 한국불교의 위상을 각인시켰을 뿐 아니라, 한국불교가 종교로서 수승한 경지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까지 전달했으니 얻은 수확이 적지 않다”고까지 극찬했다.
그에 반해 일부 외신이 ‘자승 총무원장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생명결사를 이야기 했다(Ja-Seung, a Korean Buddhist representative, told religious leaders to join in a “fraternity for life.”)’라고 짤막한 한 줄 보도에 그치고 있어 커다란 아쉬움을 갖게 한다. 추상적인 보도를 넘어 현장 분위기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현지 언론의 반응 등을 곁들일 필요가 있었다. 나아가 제시한 5대 결사를 국제사회에 확산시켜가기 위한 과제는 무엇인지 함께 다루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장영섭 기자의 “봉암사서 자성.쇄신 결사 의지 다졌다”라는 기사는 결사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스님들이 총무원장 스님과 집행부를 격려하면서 결사 정착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내놓았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자문위원 스님들이 제시한 그 다양한 방안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울러 총무원장 직선제 내용까지도 보도하는 용기가 필요했다고 본다.
총무원이 티베트 스님의 소신공양에 논평을 했다. 사실상 그 동안 중국에 눈치를 본 행보로 보아 파격적이다. 11월 12일자 홍다영 기자의 “문화적 말살이 극단 상황 내몰아”는 적절한 기사였으나 중국정부를 겨냥한 좀 더 비판적 내용이 아쉬웠다.
연재 중인 ‘강우방의 새로 쓰는 불교미술’은 한국불교미술사를 새롭게 정립해 가고 있는 연재로 특별한 관심을 모은다. 강우방 선생의 영기문 해설은 매우 독특하고 독창적이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조형해석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접근은 미술사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상과 철학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신문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칭찬할 일이다.
불교신문이 11월부터 영어지면을 신설했는데 좋은 아이디어다. 한국불교가 동북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려면 인터넷 판이라도 중국어와 일어판도 내놓을 필요가 있다. 영담스님이 ‘2011 치하얼공공외교 대회’에서 “중국불교는 관제 또는 통제의 이미지며 한국에 위협적”이라고 한 발언은 심도 있게 보도했어야 했다.
인터넷 판에선 기사를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기사와 편집의 자율성 보장은 언론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며 한국불교 발전의 토대를 지키는 일이다.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교계의 대표적 언론매체 종사자로써 불교신문 기자와 운영진은 관음보살이요 호법신장이라는 긍지를 갖고 일하기를 바란다.

정체성을 잘 지키고, ‘장점은 극대화 단점은 최소화’ 해야한다.
불교신문은 ‘조계종단 기관지’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특단의 상황이 아닌 한 이를 뛰어넘을 수도, 또한 일부러 이를 벗어나려 해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불교신문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조계종단 기관지로서의 장점은 여타의 불교언론매체에 견주어 대내외적인 권위, 신뢰 획득이 쉽고, 운영재원 마련에 대한 압박이 덜하며, 다양한 취재원과 양질의 기고자 확보가 쉽다는 점일 것이다. 그와 반대로 종단기관지로서의 단점은 기자와 편집진이 수동적이 되기 쉽고, 기사 내용이 권위적이며, 무겁고, 딱딱하고, 차갑고, 변화에 발 빠른 대처가 어렵고, 틀에 박히기 쉽다는 점일 것이다.
잘 아다시피 저마다 장단점이 있음을 보고,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최소화할 줄 알며, 마침내는 단점마저도 장점으로 바꾸는 원력과 지혜를 갖고 정진하는 것이 불자라 생각한다. 불교신문사도 응당 그러해야 하리라 믿는다.
장점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 단점은 최소화하고 있는지 자성과 쇄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모든 장점을 살려야 하겠지만 특히, 다양한 취재원과 양질의 기고자 확보가 쉬운 잇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면을 다양화하고 내용의 깊이와 재미를 더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편집과 디자인에도 좀더 신경써서 불교계 최고의 신문다운 느낌이 들게 했으면 좋겠다. 나이드신 독자가 많다는 것을 감안해도 글꼴과 크기, 농도 등을 조정하여, 신문을 막 받아보았을 때 스마트한 느낌이 들어 젊은이들도 호감을 갖게 해주면 더 좋겠다.
그리고 현재 불교신문의 광고는 본문의 기사와 부조화를 이루는 경우가 많고, 어지러운 느낌을 받는다. 광고에 대한 관점, 편집, 디자인, 위치 등에 대해 종합적인 검토를 하여 광고기사에 대한 전면적인 지면개편이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
획기적인 지면 참여의 기회를 주면 좋겠다.
소통은 참여의 씨앗이며 참여는 소통의 열매일 것이다. ‘열린마당, 불교신문 이렇게 생각한다’는 기획자체가 소통을 위한 불교신문의 진일보된 노력이라 생각한다.
소통하기 위한 노력만으로도 소중하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노력이 불교신문에 적극적인 참여라는 열매로 귀결된다면 더욱 아름다우리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매주 한 면을 ‘청년불교’를 위해 할애해 준다면, 우리는 그 지면을 ‘청년 사자후’(칼럼), ‘청년 유마’(청년불교 선정 53의 청년불자), ‘청년광장’(청년불교 수행/봉사 등 행사/활동/소식마당) 등으로 꾸며 불교신문에도 도움되고, 청년불교 활성화에도 힘이 되게 해보고 싶은 것이다. 불교신문의 입장에서는 약간의 위험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약 1년 정도씩 청년, 대학생, 여성, 봉사/국제구호 등의 분야를 이끌어가는 대표단체에 권한을 주면 엄청난 변화가 있지 않을까?
뜻과 원력을 가진 단체와 사부대중에게 획기적인 지면참여의 기회를 제공하여 사부대중이 불교신문이라는 전법불사의 주인공이 되게 해주면 좋겠다.

실제 불교신문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정.관.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다양한 인터뷰. 기획연재를 통한 대담 ‘스님과 지성인의 만남’은 빠짐없이 보게되는 새로운 코너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국제포교사회와 공동으로 영어지면을 신설한다고 한다. 영어지면은 국내외 외국인이나 관광객들에게 한국불교를 알리기 위한 새로운 시도일 것이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코이’라는 관상어가 있다. 빨간무늬에 흰반점이 있는 비단잉어이다. 어항에서는 5cm 정도 성장하지만, 수족관이나 연못에서는 25cm나 성장한다고 한다. 강물에 방류하면 1m 이상도 성장한다. 처한 환경에 따라 성장 크기가 틀린 코이라는 특이한 체질의 비단잉어를 보며 불교신문의 꿈과 목표를 생각해 본다.
불교신문의 꿈과 목표를 종단 내 구성원들에게 한정 짓는다면‘어항속 코이’라 할 것이다. 꿈의 크기는 제한할 수 없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몇 가지 새로운 시도들은 어항 속 코이가, 어항을 깨고 연못으로 헤엄쳐가고 있음을 알리는 사업이라 생각한다. 이 시도들은 더 많은 독자들에게 한국불교의 오늘을 알리며, 불교신문의 새로운 인연고리를 넓혀갈 것이다. 이렇게 연못에서 더 튼튼하게 성장하고 자연을 경험한 코이는, 다시 강물도 헤엄쳐 드디어 바다를 꿈꾸며 살게 될 것이다.
이제 불교신문의 외연(外緣)를 넓혀야 한다. 외연이란 둘레이다. 불교신문이 종단 내부에선 바른 언론으로서 종단 내 사업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제공한다. 밖으로는, 한국사회의 여러 이슈를 불교적으로 해석한 기사들로, 일반시민사회가 불교를 접하게 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다른 언어는 또 하나의 세상이다. 지금 신설하게 될 영어지면이 앞으로 불교신문 영어판으로 성장해, 세계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불교신문, 꿈꾸게 된다.
[불교신문 2772호/ 11월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