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는 청년불자들이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불교자주화, 10.27 법난 진상규명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청년 승가 재가불자들이 1987년 서울 개운사에서 불교대회를 개최하는 모습.
신흥사 사태는 불자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재가자들의 상실감은 특히 컸다. 1970년대 종단 폭력사태에다 10.27 법난을 목격한 재가자들은 스님들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많이 상실한 상태였다. 젊은 스님들 역시 10.27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주로 중앙승가대학을 설립한 주역들이 80년대 초기 청년 승가 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청년불교도 연합을 결성, 청년 승가의 조직화를 시도했다. 젊은 스님들은 대학생불교도연합회 전국법사단을 결성해 대학생들과 만남을 가졌다.

대학생들은 그들대로 197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불교를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 까지 재가자와 젊은 스님들은 ‘보조자’ 거나 아웃사이더였다. 종단은 몇몇 중진들의 전유물과 다름 없었다. 재가불자들은 종단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봉은사에 개설된 대학생 수도원에서 보듯 자신의 수행과 불교 공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1970년대 까지의 수행중심의 개인적인 활동이 1970년대 말부터 조금씩 변화를 보이다가 1980년대 들어서면서 확연히 달라졌다. 10.27법난이 이유였다.

1970년대 중반 등장 민중불교운동 이념 본격적 전개

대불련 출신 진보 불자 사찰 근거지 삼아 민중운동 추구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이 한국 진보진영으로 하여금 미국의 존재를 다시 보게 했듯 10.27 법난은 청년 승가와 재가불자들에게 호국불교의 허구성을 보게 했다. 청년 불자들과 신도들은 10.27법난을 지켜보면서 ‘올 것이 왔다’는 자조와 더불어 불교를 총무원과 중앙종회의 몇몇 중진스님들에게 맡겨두어서는 안된다는 자각을 하기에 이러렀다. 이는 젊은 승가도 마찬가지였다.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청년 승가와 청년불자들이 1983년 신흥사 사건을 전후해 합류했다. 그리고 이전에 없었던 불교개혁안이 거침없이 터져 나왔다.

재가불자들의 새로운 움직임은 1970년대 중반 동국대 서울대의 대학생 불자들 사이에 ‘민중불교운동’이념을 받아들이면서 싹을 틔웠다. 민중불교운동의 1세대 격인 여익구를 중심으로 1975년 고준환 황석영 등이 결성한 민중불교회가 진보적 불교운동의 시초였다.

이후 대불련 회장이던 전재성이 1977년 월간 <대화>에 ‘민중불교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민중불교 운동 이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유신정권의 긴급조치로 구속되면서 민중불교운동 이념은 조직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대불련을 중심으로 일부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1980년대 초반에는 재야운동권 인사들이 사찰에 은신해 행자나 승려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기존 스님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본격적인 움직임은 10.27 법난 이후 일어났다. 광주민주화 운동과 10.27법난을 목도한 청년불자들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의 보수적이고 자기 수행적 운동의 한계를 보고 새로운 형태의 불교운동을 고민한다. 그래서 나온 방안이 베트남 모델을 근거로 사찰을 민중운동의 근거지로 삼는, 불교운동 방식이었다. 서울대 동국대를 중심으로 서울지역의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이 운동은 사찰을 근거로 민중주의를 추구했다. 사원화 운동 초기에 대해 다룬 서동석 전 민중불교운동연합의장의 글을 살펴보자.

“이후(송광사 대불련 대회에서 민중불교를 소개하려는 시도가 보수적인 대불련 지도부의 저지로 좌절된 뒤. 편집자), 이희선, 노일현, 김지형은 대불련이 이미 소시민적으로 서클화되어 개혁되기 어렵다고 보고, 지역 사찰 대학생회와 청년회를 연계한 새로운 불교운동을 모색하며, 이희선은 후에 이를 ‘사원화 운동’이라고 이름 붙인다.

1979년 가을 이희선은 출옥한 안동일과 만나 그와 조계사 불교학생회 고등학생회 동기인 조성열과 함께 불교 학습 모임을 하기로 한다. 이희선, 안동일, 조성열, 신상진, 김정우 등이 법련사에서 학습을 하며 사찰 대학생회를 만들 준비를 한다.

1979년 11월 만기 전역한 최연은 80년 1월 대불련 총회에서 대의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사퇴하여, 대불련은 다시 새로운 전기를 기다리게 된다. 1980년 봄, 노일현은 동국대 학생회 부활위 총무를 맡으면서 학교일에 전념하게 되고, 김지형은 대불련 부회장을 맡게 된다.

이희선은 그 해 봄의 동국대 민주화 운동을 ‘민주화 대약진 운동’으로 이름 붙이며, 학내 시위를 주도한다. 80.5.17 광주민주대항쟁 이후, 법련사 모임은 추진을 가속하여 80년 10월 초, 마침내 삼청동 칠보사에서 ‘칠보사 대학생회’(초대 회장 이희선)를 창립 한다.” <불교포커스 기고>

법련사 칠보사에 이어 동대문구의 묘각사, 청룡암 등에도 팀이 결성된다. 이들은 사찰 대학생회나 청년회를 내걸고 실제로는 불교 지하 서클 성격을 띠었다. 민중불교운동, 사회과학 등을 학습했다. 명칭은 ‘사원화 운동’ ‘여래사 운동’등으로 통일되지 않았는데 불교가 민중속으로 들어가 함께 하는 민중주의를 표방했다.

여래사 운동의 기관지라 할 수있는 <청년여래> 창간호 ‘서문’에서 최연은 “불교가 중생교화의 본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아울러 사회구조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인간으로서 중생을 인식해야한다.

칠보사 등지에서 학생회 결성, 이념 학습 하다 대거 구속

중앙승가대 동국대 등 청년승가와 만나 사회민주화 참여

하화중생의 구체적인 방법론의 모색과 그 실제 적용을 위한 사회와 민중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함께 엮어 명실공히 젊은 불자들의 전열을 정비하여야만 한다. 이렇게 만난 동지들을 여래사(如來使)라 하며 여래사들의 재도전을 여래사 운동이라고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운동가로서 제대로 훈련되지 않고 아마추어적인 학생운동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들은 지방 야유회를 갔다가 회원 중 한명이 실수를 하는 바람에 1982년 초 관련자들이 구속된다. 사법당국은 이 운동을 불교사회주의운동으로 규정해 중심인물인 법우스님, 최연, 신상진 등 3명을 구속하고 수많은 스님 청년 학생이 정보기관에서 심한 고문과 조사를 받으면서 일시 중단 된다.

초기 사원화 운동을 주도했던 1970년대말 학번들은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거나 학내 운동권으로 흡수된다. 80.81학번인 후배그룹은 이후 사원화 팀을 재건하는데 이를 ‘재건사원화운동’이라고 불렀다. 1987년 까지 활동했던 ‘재건파’들은 한 동안 불교청년운동의 중추역할을 담당한다.

이들은 민중불교운동연합이나 동국대 석림회의 진보적 스님들과 사회과학 학습, 사찰대학생회 간부, 학내 대불련 지회나 지부단위 등으로 나뉘어 활동하면서 불교운동의 저변 확대 및 활동가들을 양성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성남에 기반으로 한 노동운동으로 투신했다.

10.27법난 이름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처벌을 받아야했던 5공 시절 부처님오신날 제등행렬 때마다 10.27법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투옥되고 학교에서 제적된 대학생들이 바로 이들 ‘재건사원화’ 멤버들이었다. .사원화 운동은 사찰을 변혁하거나 민중불교운동을 전파하는 창구 역할은 하지 못했지만 1980년대 진보적인 청년 재가불자를 양성하는 ‘학교’ 역할은 톡톡히 했다.

특히 동국대와 중앙승가대학의 젊고 진보적인 스님들과의 만남은 이후 새로운 청년승가 문화를 형성하는데 기여를 하게 된다. 사원화 팀 소속 대학생 청년들과 사회과학을 학습한 젊은 스님들은 이후 스님들만의 단체를 만들어 종단개혁과 사회민주화의 일익을 담당한다. 광주 민주화 운동과 10.27 법난을 보고 분노한 청년 불자들과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자각하던 젊은 스님들은 신흥사 사건으로 만나게 된다.

■ 종회의원들 질타하는 청년 불자들

종단 사상 최초 재가자 종회 발언

젊은스님들 “모두 사표쓰라” 일갈

신흥사 사태는 종단 주류에 있던 스님들의 위신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여태 껏 종단의 ‘아웃사이더’ 였던 청년 대학생 불자들과 젊은 스님들이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열린 1983년8월20일 제78회 임시중앙종회에는 스님들이 아닌 신도 청년 학생 대표들이 회의에서 발언을 했다. 종단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당시 김영국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회장은 “도대체 우리 불교의 젊은 학생들은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따라 가야 합니까? 여기 이 자리에 모이신 스님들 우리 젊은 학생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얼굴을 들고 이 자리에 나와서 앉아 있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질타한다.

배조웅 대한불교청년회 회장은 종단 개혁의 일환으로 종단 운영을 2부중 중심에서 4부중으로 확대할 것을 요청한다. 그는 “이제부터는 4부대중이 공동 참여를 해서 이마를 맞대고 종단의 새 발전을 위해서 지혜롭고 슬기롭게 종단운영을 해야 할 시기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고 강조한다.

박완일 전국신도회장 역시 4부중 중심을 제안한다. 그는 “불교 중흥을 위해서 4부대중의 일치된 힘으로 4부대중이 참으로 불교중흥에 동참할 수 있게끔 하는 그런 제도의 마련이 병행해서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라며 신도들의 적극적 참여가 있을 것임을 밝혔다.

재가자들 뿐만 아니라 젊은 스님들의 분노도 극에 달했다. 청년불교도연합회 대표 석도수스님은 “우리들이 스님들께서 배우고 보고 배운 게 뭐가 있습니까. 싸우는 것 밖에 안 배웠습니다. 폭력배가 되어야 이 종단에서는 출세할 수 있다 이것만 배운 것입니다”라며 “저희들이 원로스님이나 청정하다고 존경하는 스님들을 모시고 해결 할 테니까 총무원 일과 종회 일은 걱정 마시고 싹 사표를 쓰고 물러나시고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고 일갈한다.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전조(前兆)였다.

[불교신문 2763호/ 10월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