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송년법회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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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류청하 작성일10-11-29 20:30 조회3,352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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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27_대불청_법어_설담 원혜 큰스님.hwp (22.0K) 67회 다운로드 DATE : 2010-11-29 20: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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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청 법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청년 불자의 사명
반갑습니다.
대불청 25대를 맡아 수고하신 정웅정 회장과 임원 여러분,
그리고 새롭게 26대를 맡으신 정우식 회장과 임원여러분을 비롯해 전국에서 오신 대한불교청년회의 여러분을 모두 환영합니다.
오늘 법문을 요청받고,
대불청의 새 집행부가 꾸려져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 해를 준비하는 중요한 모임이니
대불청 여러분들의 신행활동과 대불청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법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올 한해를 자연스럽게 되돌아보았습니다. .
돌이켜보니 올해 2010년은 한국불교에 많은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적지 않은 풍파를 겪었습니다만 불교 또한 적지 않은 풍파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우연찮게 그 가운데 많은 일들이 저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들을 겪으며 느낀 소회를 여러분께 말씀드리며 과연 이시대에 불자로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대불청의 일꾼 여러분
청년불자들은 불교의 양심이고 희망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힘찬 동력입니다. 올해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우리 한국불교에는 건강한 청년불자들이 더욱 필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확인했습니다.
우리 6교구 마곡사에서 4대강 반대 운동을 위해 공주 공산성에 금강선원을 만들때도 대불청이 함께 4대강 반대운동을 해 주시기 때문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곡사가 생태농장을 만들고 생태사찰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것도 대불청에서 생활협동조합운동을 해 주기 때문에 힘을 받습니다.
한국불교 1700년의 찬란한 전통을 제대로 이어가려면 스님들만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청년불자들의 힘찬 외호가 있어야만 불교가 바로 서고 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타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직화가 약한 불교계이기에 우리 대불청의 건강한 일꾼들은 특히 소중합니다. 혼자서 떠드는 외로운 목소리 보다는 여럿이 함께 외치는 함성이 더 강력하고, 한 지역에서 고립된 움직임보다는 전국에서 함께 실천하는 몸짓이 더 힘찹니다. 대불청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해 주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킨 정치권의 불교 외압 문제에 맞서 불교의 자주성을 지키는 노력은 물론, 타종교의 무례하고 폭력적인 훼불사건에 대한 단호한 대처에서도 청년불자들의 주인된 노력이 정말로 필요한 한 해였습니다.
청년불자여러분
지난 5월 ‘2010 OECD 통계연보’가 발표되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 당 21.5명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로 OECD 평균 자살률의 두 배에 달합니다.
출산율은 1.19명으로 가장 낮습니다. 애를 적게 낳는다고 걱정하는 일본은 1.37명이고, 저출산국가로 알려졌던 프랑스는 어느새 2명으로 늘었습니다. 참고로 OECD 평균은 1.78명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태어나기는 어렵고 죽기는 참 쉽게 죽습니다.
저출산율에 대해 유식한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산업구조가 바뀌고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계층이 아이 낳는 것을 주저한다고. 또 고학력 여성이 직장을 다니며 임신과 출산을 하기 어려운 사회적 환경도 한 몫을 한다고 말이지요. 한마디로 돈이 없어서 낳는 것도 어렵고, 낳아서 제대로 기르는 것도 자신이 없으니까 출산율이 자꾸 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통계와 더불어 자살에 대한 국민태도조사에서는 국민 3명 중 1명이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자살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거나 개인이 자살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평균 3명 중 1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에 자살 충동률이나 자살에 대한 의식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언제부터 목숨을 이렇게 하찮게 여기게 되었을까요.
출산율, 자살율 같은 암울한 통계는 단순히 우리 사회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만이 아니라 더 암울한 미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경고’입니다.
지난 G20을 맞아, 인류의 진정한 번영이 무엇인지 인간으로서 참된 삶이 무엇인지 그 가치를 되짚어보며 올바른 진화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세계종교지도자들이 모여 한마음선원에서 포럼을 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많은 좋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불교텔레비전에서 그 영상을 볼 수 있으니 시간을 내어 한 번쯤 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한 발표자가 자살률과 출생률의 문제 또한 다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문제는 우리가 만들어낸 상황이고 우리가 어떻게 하든 해결하고 변화시켜야 하는 문제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비뚤어진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현세의 고통인 것입니다.
현재의 경제체제는 우리를 고통으로 이끄는 가치, 탐욕에 근거한 자본주의에 의존하면서 끝없이 이익을 추구해야 존재합니다. 탐욕은 끝없는 소비를 불러 일으키고 소비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에 소비주의는 실제로 새로운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기본적인 필요와는 거리가 멀고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고통과 대립의 원인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전세계의 종교지도자들이 지적하는 것은 우리 삶의 방식과 마음입니다. 우리가 말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 삶은 자본주의의 욕망 시스템에 올라 앉아 있기 때문에 현재의 모든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냐는 성찰입니다.
환경론자이자 경제학자인 폴 홉킨스는 “우리는 미래에서 훔친 것을 현재에 팔고 있으면서 그것을 GNP라고 말한다. 우리는 미래를 치유해야지 훔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자비의 얼굴을 한 새로운 경제체제, 나눔을 실천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온정을 띈, 이윤보다는 사람을 우선순위에 둔, 올바른 의식을 가지고 우리의 자원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과 고통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희망을 고양하는 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2부 사회를 맡은 세네갈에서 온 두두 디엔박사는 타종교간의 화합은 신학에서 윤리로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신학이 도덕적 가치관과 윤리 위에 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도덕적 가치관과 윤리위에 서지 않은 종교는 오히려 전쟁과 폭력의 도구입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종교갈등만 보아도 자명합니다.
더 나아가 진정한 불교인이라면, 스스로의 신앙을 이 기준으로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성장시켜야 합니다.
대불청 여러분
수라도(修羅道)와 같이 되어버린 세상을 다시 인간도(人間道)로 돌이키는 일은 오직 불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불자들만이 우리 인간이 간직한 소중한 불성의 가치를 되살려 세상을 다시 사람답게 사는 곳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진실’과의 참된 대면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제나 덧없이 바뀌어 무너지는 ‘무상’의 도리를 피할 수 없습니다. 권력도, 지위도, 재산도, 건강도, 모두 영원하지 않습니다. 나자신보다 더 소중한 가족조차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무상의 도리를 사무치게 깨닫게 되면 비로소 ‘마음’ 하나만이 나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팔만사천법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스승님들은 말씀하셨습니다. 재산도 명예도, 나아가 내 몸까지도 때로는 잃거나 남에게 휘둘릴 수 있지만, 마음만은 끝까지 내 뜻으로 간직하고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덕산 스님이 용담선사를 찾아 법을 구하며 스님을 모셨습니다. 어느날 밤 늦도록 용담선사의 시봉을 들고 있자 스님은 그만 물러가 쉬라고 하였습니다. 덕산 스님이 인사를 드리고 방 밖으로 나와 보니 달빛도 없이 깜깜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밖이 너무 어둡다고 말하니 용담선사는 촛불을 주었습니다. 덕산스님이 촛불을 받는 순간 용담선사는 갑자기 촛불을 훅 불어 꺼버렸습니다. 그 순간 덕산스님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밝은 방안에 있다가 어두운 곳에 나섰을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촛불에 의지할 다가 그 촛불마저 꺼졌을 때 더욱 그 어두움은 짙게 느껴집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각하(看脚下) 혹은 조고각하(照顧脚下:照,비출조, 顧. 돌아볼고, 脚.다리각, 下,아래하))라고 절 기둥에 쓰인 글이 바로 이런 때를 위한 글입니다. 스스로 발밑을 살피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 한 걸음을 내 딛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인생의 먼 길을 가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윤회의 머나먼 길을 가는 중생들에게도 꼭 필요한 충고입니다. 당장 자기 발아래를 살펴 조심하고 삼가면서 살아가는 것, 수행의 길에 이보다 더 뜻 깊은 충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20세기의 성자 간디가 말하길 ‘내가 평화로우면 평화가 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원각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과 같습니다. 심청정 국토청정(心淸淨 國土淸淨)이라는 원각경의 이 말은 나 스스로의 자각과, 나 개인을 뛰어넘는 사회적 실천이 이룩하는 공동체의 완성을 짧고 간결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불청의 일꾼 여러분
마음공부를 잘못 이해하면 관념론이 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각으로 끝나는 관념론이 아닙니다. 불교의 마음공부는 근본인 마음을 바꿔서 개인의 삶은 물론 살아가는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실천론입니다.
바로 우리 불교를 대표하는 청년불자단체인 대불청에 소속된 불자 한 분 한 분이 마음공부를 성취해 삶 속에서 부처님의 법을 증명하여야 합니다. 그런 삶을 경전에서는 성스러운 행위라는 뜻의 성행(聖行) 또는 범천의 실천이라는 뜻의 범행(梵行)이라고 합니다. 불자는 성스러운 삶을 사는 존재, 온 우주의 주재자인 브라흐만의 실천을 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 실천이 바로 자비행입니다. 바른 마음, 깨달은 마음은 저절로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말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 때 자비로운 말과 행위는 남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작용합니다. 고운 마음을 먹으면 얼굴도 고와지고 오장육부도 튼튼해집니다. 인체의 장기 중에서 위와 장에 탈이 나는 원인은 신경성 질환이 반이 넘는다고 합니다. 짜증내고 미워하는 마음을 먹으면 내 몸의 위와 장이 먼저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말도 그렇습니다. 내 입에서 가장 가까운 귀는 남의 귀가 아니라 내 귀입니다. 남을 욕하는 말, 남을 헐뜯는 말은 내 귀에 먼저 들어옵니다. 반면에 남을 사랑하는 마음, 남을 사랑하는 말은 내 건강을 북돋고 내 수명을 연장합니다.
이런 정신은 사섭법(四攝法)으로 구체화됩니다. 보살이 괴로운 세계의 중생을 구제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이끌어들이기 위한 4가지 방법인 사섭법은 보시(布施, 중생이 바라는 바를 베풀어서 불법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으로써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 등이 있다.), 애어(愛語, 부드럽고 따뜻한 말로 사람을 대하고 믿음을 얻어 마침내 불법의 바다로 인도), 이행(利行, 중생들이 이롭게 되도록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모든 행위), 동사(同事攝, 중생과 함께 같은 일을 하는 것으로 고통받는 중생을 보면 함께 그 고통을 아파 해주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면 함께 그 어려움을 감당해 주는 일)입니다.
사섭법의 첫 번째가 베풀고 나누라는 보시지요. 공자도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고 했듯이, 세상 어려움에 빠진 중생들에게는 먼저 당장의 굶주림과 궁핍함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어야하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주어야 합니다. 병들어 아픈 사람은 친절한 간호와 약 하나가 절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지도론>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중생들은/ 옷과 밥으로 살아가나니/ 만일 훔치고 빼앗는다면/ 곧 생명을 빼앗는 것이 된다."
사섭법은 단지 수단이 아닙니다. 이는 중생세간의 고통과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근원적인 방법입니다. 보시와 애어와 이행과 동사라는 이 네가지의 실천이 있다면 세상 중생들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곧 없어질 것입니다.
대불청 여러분
몇 년 전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바미얀 석불을 로켓포로 폭파해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슬람세계의 많은 율법학자들까지 나서서 말렸지만 결국 막지 못했습니다. 세계인들은 편협하고 광신적인 종교인들의 문화적 야만성과 폭력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적 야만성 <반달리즘>은 이보다 더합니다. 봉은사 땅밟기라는 비디오가 터져나온 뒤 그런 일들이 봉은사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나아가 해외에까지 나가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첨단 I.T강국이라는 대한민국, G20회의를 개최하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야만입니다.
정말로 걱정스러운 것은, 배타적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로 인해 불교가 피해받는 일뿐만이 아니라, 이런 야만적 문명이 이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등 모든 면에서 주류로 행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말로 깨어있는 불교인이라면 불교가 피해를 받을 때에만 잠시 꿈틀하는 것이 아니라 이사회의 전반에 벌어지는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폭력과 상식을 벗어난 문제들에 대해 깨어있는 시각으로 성찰하고 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청년불자들은 이와 같은 야만의 시대에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중이 되어주셔야 합니다. 정법의 횃불을 높이 들어 때로는 자비로, 때로는 절복으로 싸워주어야 합니다.
대불청여러분여러분들은 이 혼탁한 세상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처럼, 부처님의 법 안에서 함께 정진하는 도반입니다. 이기적으로 자기 혼자만의 이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우리 중생세간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상의상생의 연기도리를 파괴하는 물신주의 풍조를 배격하고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막개발이라는 삽질로 생태계를 파괴하는 4대강을 반대함으로써
환경과 생태를 걱정하고 자연을 지키기 위해 애써주고 있습니다.
또한 건강한 먹거리를 위해 생활협동조합을 꾸리고 지역의 건강한 농산물을 유통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들이 당장 효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옳은 일이기에 어려워도 해야 합니다. 꾸준하게 해 나가면 언젠가 활짝 꽃피울 날이 올 것입니다.
대불청이 불교청년운동의 중심으로 꾸준히 나아가면서, 뜻있는 이들의 구심점이 되어 나날이 발전해서, 다음번에는 마곡사와 태화산 수련원이 좁아서 행사를 못치르겠다는 소리가 나오도록 크게 크게 번창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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