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광복 77주년 기념 - 애국과 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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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한불청지기 작성일22-08-12 13:08 조회1,675회 댓글2건본문


광복 77주년 기념 칼럼
<애국과 매국>
온 겨레의 염원인 8.15광복을 맞이하고 장장 77년 세월이 흘렀다. 조선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으나 한반도를 노리는 강대국들의 쟁탈 속에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한국전쟁이라는 비극까지 겪어야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해방 정국 당시 겨레와 민족을 위해 나선 올바른 지도자를 중심으로 온 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외세를 물리쳤다면 지금 우리의 삶과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일제가 패망한 77년 전 우리나라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 시작은 미군정의 행정권 장악에서 촉발되었다. 미군정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 대신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고 고문한 친일파들을 행정, 사법, 치안 곳곳에 기용하여 목숨을 부지하려 숨어있던 자들에게 완장을 채워주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독립운동가가 해방 후에 친일파들에게 잡혀 고문과 수모를 당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는 분열로 치달았다. 결국 민족의 지도자라 불리우던 김구 선생은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했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며 새로운 국가 건설에 힘썼던 여운형 선생마저 암살당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에게 혹독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던 친일경찰 노덕술의 일화는 유명하다. 의열단을 만들고 항일독립운동을 치열하게 벌였던 약산 김원봉. 그는 1947년 2월 노덕술에게 체포돼 갖은 고문을 당하고 뺨을 맞는 등 수모를 당했다. 김원봉은 원통해서 3일 간 울었다고 한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 조국이 왔건만 일제 강점기와 다를 바 없이 친일 경찰들이 반공투사로 둔갑해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잡아들이는 모습에 절망했을 것이다.
반면 친일반민족 행위자였던 노덕술은 해방 이후 경찰과 군 간부로 승승장구하며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 등 세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훈장을 수여받았다. 노덕술은 평생을 호가호위하며 살았다. 살아서는 애국자를 때려잡고 공적을 세워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고 죽어서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이런 자들이 죽어서도 단죄 받지 않고 출세를 거듭하는 동안 우리 역사의 뒤틀림은 계속되고 있다.
친일파에게 8.15 광복은 축복이었을지도 모른다. 왜구의 주구 노릇하던 하류인생들이 왜구가 물러가자 주인의 자리를 꿰찼다. 주종의 뒤바뀐 관계는 77년이 지났건만 원상복구 되지 않고 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나섰던 독립운동가들은 고문과 모욕을 당하고 그 후손들은 연좌제에 묶여 출세의 길이 모두 막혀버렸다. 가난과 절망의 고통이 여전히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친일적폐를 청산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후과를 우리 모두가 감당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매해 광복절을 기념하지만 우리가 진정 광복이 되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매해 광복절을 맞이하는 마음이 가볍지 않은 이유는 당시의 노덕술이 여전히 존재하고 우리사회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애국자인 만해스님의 자주독립을 향한 굳은 신념은 어디에서 시작하였을까? 나라와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애국과 매국은 한 글자 차이지만 만해스님의 애국적 삶과 노덕술의 매국 행보의 거대한 차이는 이미 후손들이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애국을 택한 만해스님과 매국을 택한 노덕술, 우리 청년불자들이 광복절을 맞으며 깊이 생각해볼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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