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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태 작성일11-06-13 22:11 조회4,1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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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종교칼럼]과연 누가 깨달은자 인가?
newsdaybox_top.gif 2011년 06월 05일 (일) 17:54:35 박문선 기자 btn_sendmail.gif mytao@hanmail.net newsdaybox_dn.gif

   
▲ 호남취재본부 박문선 본부장
인류는 고통을 피하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하여 수많은 시간동안 나름대로 강렬한 의지를 불태우면서 노력을 해왔다. 깨달음의 꽃이라 불리는 무상정등각의 견처는 완성된 수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어 왔다.

하지만 바른 깨달음을 인도해주기 위해서 팔정도 같은 수행 방향을 잡아주는 지침서도 있지만 3천년이 가까워진 지금은 깨달음의 존재가 연막처럼 혼돈과 베일에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어 참학인들 조차도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정법과 사법이 긴밀히 뒤섞여 돌아가면서 말법시대를 장식하고 있다.

눈 밝은이가 아니라면 정법을 참으로 구별을 어렵게 한다. 요즘은 갈수록 비법이나 사법들이 난법을 일으켜 정법행세를 하며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사마외도 수련자들이 수행과정에서 일부 신통한 능력을 얻어 마치 깨달은 각자인양 혹세무민을 일으켜 세상 사람들을 함정으로 인도하는 경향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기치료, 퇴마능력 같은 것은 수행중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일시적인 하나의 경계일 뿐인데 마치 득도인양 착각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았다고 자처하는 허황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일반인이나 학인이 가끔 있음을 보게 되는데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또 깨달음에 대한 말들이 애매모호하고 근거가 거의 없고 또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쉽게 가려내지 못하기 때문에 깨달음에 대한 착각의 글들이 계속 등장하고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글들을 일반인조차도 대부분 혹세무민을 일으켜 결국은 다 같이 함정 속으로 함께 빠지는 동업중생의 고통을 만들어가고 있다.

불교의 수행과 깨침은 심오한 세계이므로 복잡난해한 점이 많기 때문에 잘못 이해되는 점이 많다. 이런 경우에는 적절하게 비판하는 것이 진실을 위하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깨달은 자들은 말이나 법문 기타 게송으로 학인들에게 깨달음을 노래 해준다. 흔히 오도송이라 하여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견처를 함축적인 시로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 관례로 나타나고 있다. 과연 제대로 깨달았는가 아직 못 미치는가는 일반 중생들은 참으로 구별해 내기 어렵기 때문에 하루속히 깨달음에 다가서서 스스로 안목을 넓혀 밝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

자 그러면 국내에서 유명하고도 유명한 자칭, 타칭 깨달았다고 하는자들에 대하여 그 게송을 다시 살펴보고 문제된 부분이 있다면 함께 짚어보고 공부하여 바른 안목을 가져보는게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선지식들의 게송을 하나하나 평하기에 앞서 그분들을 폄하 하거나 명예를 훼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오직 게송 자체만을 가지고 글로써만 도리에 과연 부합한지 또는 과연 깨달은자의 견처 인지에 대하여 다시 한번 되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먼저 부산 해운정사, 대구동화사 조실로 주석하고 계시는 진제대선사님의 게송부터 들어보자.

진제스님 오도송 (悟道頌)-
1962년 '항엄상수화' 화두 타파 후 지으신 오도송이라 한다.

這箇拄杖幾人會(자개주장기인회)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三世諸佛總不識(삼세제불총불식)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 알지 못함이로다.
一條拄杖化金龍(일조주장화금룡)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룡으로 화해서
應化無邊任自在(응화무변임자재) 한량없는 조화를 자유자재 하는구나.

◆박문선평창: 첫 구절은 틀린 말은 아니다. 두 번째 구절에는 식을 언급했다. 만약 식이 아니고 도리였다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당연히 안다고 해야 맞다. 식은 깨달음과 상관이 없다. 세 번째 구절 “한 막대기가 금룡으로 화해서” 이 대목은 한 막대기라는 일원상에 걸려있는 견처다. 즉 조사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무문관의 하나에 막혀있다는 것이다. 각인이라면 이 하나조차도 타파했어야 했다.

혹시 몰라 진제스님의 다른 게송을 살펴보았다. 1967년 '일면불 월면불' 화두 타파 후 지으신 오도송을 놓고 감파를 해보자.
 
一棒打倒毘盧頂( 일봉타도비노정) 한 몽둥이 휘두르니 비로정상 무너지고
一喝抹却千萬則(일갈말각천만칙 ) 벽력같은 일 할에 천만갈등 흔적 없네
二間茅菴伸脚臥(이간모암신각와) 두 칸 토굴에 다리 펴고 누웠으니
海上淸風萬古新(해상청풍만고신) 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구나.

◆박문선 평창:
첫 구절의 한 몽둥이 그리고 둘째구절 일 할 역시 마찬가지로 일원상에 걸려있다.
일원상에 걸려있으면 셋째구절과 같이 쉬고 있어도 소소영령, 성성적적이 아닌 무기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만년토록 새로워봤자 이 하나조차도 쓸어버리지 못하면 결국 중생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 “하나”라는 단계의 견처 에서는 자신밖에 구제하지 못한다. 하나라는 테두리 안에 모든 것을 가두어 놓은 경계인 것이다. 하나조차도 완전하게 세우기도 하고 쓸어버리는 자재한 견처에서 비로소 진정 중생을 구제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음은 이 시대에 유명한 종정스님이셨던 성철스님의 출가 오도송이다

彌天大業紅爐雪(미천대업홍로설)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跨海雄基赫日路(과해웅기혁일로)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방울 이슬일세
誰人甘死片時夢(수인감사편시몽)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超然獨步萬古眞(초연독보만고진)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 가노라

◆박문선평창:첫구절과 둘째구절은 같은 도리이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넷째구절의 “나홀로 걸어 가노라” 이부문에서 성철스님의 그동안 수행견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아직도 개아적인 분상이 남아 있다. 혹시 “나홀로”가 진아가 아니다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구절에 셋째 구절이다 “그 누가 잠간의 꿈속 세상에~” 여전히 아상이 남아있어 성불하지 못한 게송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번에는 성철스님이 종정으로 계실 때 설법하신 법어를 살펴보자
종정 법어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81년 1월 20일,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 취임)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소찾아 삼만리 아무리 찾아봐도 흔적조차 없구나

◆박문선평창: 일단 첫 구절의 내용은 말이 어눌해서 명확하지 못하고 둘째 구절에서 성철스님의 견처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보이는 만물이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누가 보면 참으로 듣기 좋은 설법이라 착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보이는, 들리는“에서 벌써 주객이 서있어 성철스님의 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하여 성철스님의 게송은 깨달은 자의 게송이 아님을 확연히 알 수가 있다.

이번에는 진묵대사의 오도송을 언급해 보자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고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만들어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매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

◆박문선평창: 이 게송에서는 아상이 드러나 있지 않고 또한 도리에도 남거나 부족함이 없어 정각인의 노래임이 분명하다.

이번에는 효봉스님(1888~1960) 의 게송이다.

海底燕巢鹿胞卵(해저연소록포란) 불 속 거미집엔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此家消息誰能識(차가소식수능식)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능히 알랴만
白雲西飛月東走(백운서비월동주) 백운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달리는 것을

◆박문선평창: 이 시는 진공묘유의 오묘한 이치를 노래한 것으로 게송에 남음이 있거나 부족함이 없어 정각인의 시임을 말해준다.

이 시는 효봉스님(1888~1960)의 시다. 효봉 스님은 26세에 법관이 됐으나 10년 만에 법복을 벗고 전국을 떠돌며 고행의 길을 걷다가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의 石頭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8·15 광복 이후 해인사에 伽倻叢林을 개원하자 초대 방장으로 현 조계종 초대종정에 추대되었다.

 

이번에는 얼마전에 열반하신 청봉스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게송이다.

 

差別卽平等 平等卽差別(차별즉평등 평등즉차별)
梅花元來紅 老松古今靑(매화원래홍 노송고금청)
淸潭浮明月 夜夜寂照落(청담부명월 야야적조락)
心無微塵蹤 月影亦無跡(심무미진종 월영역무적)

차별이 평등이요, 평등이 차별이라
매화꽃은 원래 붉고 노송은 옛부터 푸르른데
밝은 달은 밤마다 호수에 비치지만
마음도 머무름 없고 그림자도 남김 없네

 

◆박문선평창: 첫 구절에는 만물이 둘 아님을 말씀하셨고 셋째구절은 묘용 그리고 넷째구절에는 진공에 대하여 읊으신 것으로 깔끔하게 정법을 노래하였다.

후설: 예나 지금이나 깨달음에 대한 수행방편은 수 만 가지다. 또 깨달음에 대한 과정의 설명이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를 놓고 그동안 시비나 이설이 분분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마저도 말끔하게 정리될 시간에 이르렀다. 깨달음에 대한 과정은 누구든지 “점수돈오漸修頓悟”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점점 닦아 어느 순간에 견성성불, 확철대오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앞으로 모든 수행의 익어가는 과정은 바로 점수돈오漸修頓悟 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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