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선사 일화 속 사상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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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만 작성일12-09-21 03:18 조회3,380회 댓글1건본문
4) 總督에게 慈悲를 베풀라(총독에게 자비를 베풀라)
31본산 주지회의 때였다. 선생은 , 연설을 좀 해달라는 요청이 몇번이나 와서 마지못해 나가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하였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해마다 새해가 되면 총독 앞에 나가 새배를 하십니다. 조선을 통치하고 있는 총독의 얼굴을 직접 우러러본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된 일이겠지요.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총독을 찾아가서 얘기를 하십니다.
선생은 잠깐 말을 쉬고 좌중을 훑어본 다음,
"그런데 총독은 매우 바쁜 사람입니다. 조선 통치에 관한 온갖 결재를 하다 보면 똥 눌 시간도 없는 게 당연지사일 겝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스님이 아닙니까. 남의 생각도 해줘야지요. 조선 총독을 좀 편안케 해주시려거든 아예 만나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하였다. 이것은 친일 요소가 다분히 있었던 31본산 주지들을 나무란 얘기다.
실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하겠다.
5) 어서 덤벼 봐라 선생이 고성(高城) 건봉사(乾鳳寺)에 계실 때였다. 어느날 길을 가다가 술에 취한 그 지방의 어떤 부자를 만났다. "이놈, 중놈이 감히 인사도 안 하고 가느냐? " 하고 지나쳐 가려는 선생을 가로막고 시비를 걸었다. 선생은 못 들은 척하고 가던 길을 다시 재촉하자, 그 부자는 따라와서 덤벼들었다. 선생이 한번 세게 밀었더니 그는 뒤로 나동그라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선생이 절로 돌아온 얼마 후 수십 명의 청년들이 몰려와 욕설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이놈들 어서 덤벼 봐라. 못된 버릇을 고쳐주겠다."하고 드디어 화가 난 선생은 장삼을 걷어붙이고 힘으로써 대결하였다. 치고 받고 하여 격투가 벌어졌다. 자그마한 체구였으나 어릴 때부터 남달리 힘이 세었던 선생을 당하는 사람이 없어 하나둘씩 꽁무니를 뺐다. 강석주(姜昔珠) 스님은 선학원(禪學院) 시절의 선생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선생은 기운이 참 좋으셨습니다. 소두(小斗) 말을 놓고 그 위를 가부좌(跏趺坐)를 한 채 뛰어넘을 정도였으니까요. 팔씨름을 하면 젊은 사람들도 당하지 못했지요." 선생은 심우장(尋牛莊)에서 종종 선학원을 찾아갔는데 혜화동을 거치는 평지길을 택하지 않고 삼청동 뒷산을 넘어다니셨다. 이때 선생을 따르던 저는 당시의 일이 이렇게 생각난다. "삼청동 뒷산을 넘을 때 선생은 어찌나 기운이 좋고 걸음이 빠른지 새파란 청년이었던 제가 혼이 났었지요. 그저 기운이 펄펄 넘쳤어요. 선생은 보통 걸음으로 가시는데 저는 달음박질을 해도 따라가지를 못했어요." 또 조명기(趙明基)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만해 선생은 힘이 셀 뿐 아니라 차력(借力)을 하신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지요. 왜경이 뒤쫓을 때 어느 담모퉁이까지 가서는 어느 틈에 한길도 더 되는 담을 훌쩍 뛰어넘어 뒤쫓던 왜경을 당황케 했다는 말이 있어요. 그리고 커다란 황소가 뿔을 마주대고 싸울 때 맨손으로 달려들어 두 소를 떼어놓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지요." 아무튼 선생은 남다른 역사(力士)이기도 했다. |
6) 펜촉이 부러지다
1927년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회장(社會葬) 때였다. 선생은 장의위원 명부에 선생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음을 알고 수표동(水標洞)에 있는 장의위원회를 찾아가 자기의 이름 석자를 펜으로 박박 그어 지워 버렸다. 펜에 얼마나 힘을 주어 그었는지 펜촉이 부러지고 종이가 찢어졌다.
이것은 3·1운동 당시 월남이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 편집 보강(김영만) 전법위원 -
출처: 만해기념관(http://www.manha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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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만님의 댓글
김영만 작성일
생사를 하나로 본 만해선사의 생활 속 사상.
귀명본각심법신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