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선사 일화 속 사상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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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만 작성일12-10-02 15:29 조회3,312회 댓글1건본문
가짜 권총- 22
3·1운동 준비로 동분서주하던 선생은 당대의 거부 민영휘(閔泳徽)를 찾아갔다. 그에게 독립운동에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하므로 선생은 권총을 끄집어내었다. 민영휘는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면서 돕겠노라고 맹세했다. 이때 선생은 힘있게 쥐었던 그 권총을 그의 앞에 내놓았다. 이 권총은 다름아닌 장난감 권총이었다. 탐정 소설에나 나오는 듯한 흥미있는 이야기지만 선생의 이런 수단은 오직 독립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취해진 비장한 행위였다.
민영휘는 맹세한 터라 "비밀리에 모든 협조를 하겠소. 그에 필요한 비용도 주겠소. 그러나 이후부터는 다시 나를 찾지 말고 내 아들 형식(衡植)과 상의하여 일을 추진시켜 주기 바라오. 부디 성공을 비오."라는 간곡한 뜻을 말했다.
민형식은 이 일이 있은 후 선생의 절친한 친구의 한 사람이 되어 물심양면으로 조선 독립을 도왔고, 선생이 별세하였을 때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와서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月南 李商在와의 訣別(월남 이상재와의 결별)- 23
3·1운동을 준비할 때, 선생은 이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호응을 가장 널리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종교단체와 손을 잡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기독교측의 이상재 선생을 만나서 대사(大事)를 의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월남은
"독립선언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제출하고 무저항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하오."라고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선생은
"조선의 독립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요,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 민족의 해방 투쟁인 만큼 청원에 의한 타력본위(他力本位)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으로 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하고 주장했다.
이같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선생은 월남과 정면 충돌하였기 때문에, 월남을 지지하는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선생의 의견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은
"월남이 가담했더라면 3·1운동에 호응하여 서명하는 인사가 더욱 많았겠지만...... 죽음을 초월한 용맹이 극히 귀하다."고 한탄했다. 서명서에 기명 날인이 잘 되면 백명 이상은 되리라던 예측이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당신을 그대로 둘 수 없다 - 24
선생은 최린(崔麟)의 소개로 천도교 교주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의암은 조선 갑부 민영휘(閔泳徽), 백인기(白寅基), 그리고 고종(高宗) 못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조선인으로서는 제일 먼저 자가용 자동차까지 가지고 있었다. 선생이 3·1운동에 천도교측이 호응해 주기를 요구했더니 먼저 이상재는 승낙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손 선생께선 이상재 선생의 뜻으로만 움직입니까? 그러면 이 선생이 반대하니 선생도 그를 따르렵니까? 그러나 이미 대사(大事)가 모의되었으니 만일 호응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신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하고 힘의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말을 하였다.
이 말에 적이 놀란 의암은 자기를 총대표(總代表)로 내세우는 조건으로 서명을 승낙했다. 의암의 이 승낙으로 천도교의 여러 인사들은 의암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 편집 보강(김영만) 전법위원 -
출처: 만해기념관(http://www.manhae.or.kr/)
댓글목록
김영만님의 댓글
김영만 작성일
민족 독립을 향한 만해선사의
높고 숭고한 정신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