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선사 일화 속 사상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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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만 작성일12-10-15 15:30 조회3,508회 댓글2건본문
일본 말엔 따귀로- 43
어느날 친구 홍재호(洪在浩)와 더불어 한가히 잡담을 나누던 중 그가 무심코 일본 말을 한 마디하였다. 선생은 하던 얘기를 중단하고,
"나는 그런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오." 하고 말했다. 홍옹은
"선생, 내가 그만 실수를 했구려. 그러나 때가 때인 만큼 안 쓸 수도 없지 않습니까? " 하고 변명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그의 뺨을 한 대 철썩 때리고는 쫓아버렸다.
自 助(자조)- 44
1923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의 선전 겅연회가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만원을 이룬 가운데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회로 유성준(兪星濬) 선생의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 취지에 대하여'라는 열변에 이어 만해 선생은 '자조'라는 연제로 불은 뿜는 듯한 열변을 토했다.
말끝마다 청중의 폐부를 찌르는 선생의 독특한 웅변은 청중들을 열광케 했다.
庶民子來'라니("서민자래"라니)- 45
어느 날, 선생은 홍릉 청량사(淸凉寺)에서 베푸는 어떤 지기(知己)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였다. 많은 저명인사와 33인 중의 여러분들이 손님 가운데 끼어 있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가 오고 가다가
"부여 신궁(扶餘神宮) 낙성식이 참 굉장하더군. 과연 서민자래(庶民子來)야."
하고 누군가가 한 마디 하였다.
서민자래란, 어진 임금이 있어 집을 짓는데 아들이 아버지 일을 보러 오듯 민중이 스스로 역사(役事)를 하러 와서, 하루에 낙성하였다는 《시경 詩經》에 나오는 고사이다.
신궁 낙성식장에 사람이 모인 광경을 비유하여 일제를 찬양하는 한마디였다.
옆자리에서 듣고 있던 선생은 옆사람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중추원참의(中樞阮參議) 정병조(鄭丙朝)인데 인사 소개를 하겠다고 하니 선생은 그만두라고 하고는
"정병조야, 이리 오너라."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그도 노하여 나섰다.
"누구냐? "
"나 한용운이다. 너 이놈, 양반의 자식으로서 글깨나 배웠다는 놈이 '서민자래'라고 함부로 혀를 놀리느냐. 이놈 개만도 못한 놈! "
하고는 앞뒤를 가릴 것도 없이 자리에 있는 재떨이를 냉큼 들어 그의 면상을 향하여 냅다 던졌다. 바로 맞아 그의 면상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놈 어서 가서 너의 애비 남차랑(南次郞)에게 고발해라." 하고 큰 소리로 꾸짖고는 즉시 청량사를 나와 버렸다.
당시 일제는 충남 부여를 하나의 성지(聖地)로 정하여 이른바 부여 신궁을 짓고 있었다.
일본은 백제의 문화가 저의 나라에 건너와서 여러 모로 영향을 끼쳤던 사실을 역이용하여 한민족 말살정책의 한 방편으로 삼기 위하여 일본과 조선은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라는 이론을 위장(僞裝)하고 있었다.
청량사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바로 이러한 민족적인 울분의 표현이었다.
- 편집 보강(김영만) 전법위원 -
출처: 만해기념관(http://www.manhae.or.kr/)
댓글목록
김영만님의 댓글
김영만 작성일
단호하신 성격의 만해선사,
自助(자조)- 자기의 발전을 위하여 스스로 애씀.
냉철한 판단력으로 친일 무리에게 불호령, 만해선사 _()_
백낙종님의 댓글
백낙종 작성일
만해스님 부끄럽습니다.
스님의 후배들이 이토록 하나가 되지 못함은 무엇인지?
말법시대라 신도들도 말법시대 신도들인가?
각자 자신의 길들여짐에 너무나 충실함은
진실을 바로보지 못하는 혜안의 부재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