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선사 일화 속 사상 - 18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영만 작성일12-10-19 05:16 조회3,403회 댓글1건본문
왜놈 旗는 우리집엔 없다(왜놈 기는 우리집엔 없다)- 53
1943년, 선생이 입적(入寂)하던 바로 전해였다.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天長節)인 4월 29일에 동회 서기가 심우장을 찾아왔다.
"선생님, 저, 오늘 조선 신궁에 좀 나가셔야겠습니다."
"난 못 가겠소."
"어째서 못 가십니까? "
"좌우간 못 가겠소."
"좌우간 못 가신다니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
"그런 법이라니, 그럼 왜놈은 법이 있어 남의 나라 먹었느냐! " 동회 서기는 찔끔했다.
"그럼 기(旗)라도 다시지요."
"그것도 못 하겠소. 왜놈 기는 우리집에 있지도 않고......" 동회 서기는 하는 수 없이 물러갔다.
나 혼자라도 남겠다- 54
일제는 연합군의 서울 공습에 대처한답시고 소위 소개(疏開)라는 난동을 피웠다. 그리고 일제 당국의 책동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선생은,
"서울을 전부 소개한대도 나는 혼자 남겠다. 연합군의 공습은 우리를 돕자는 것인데 일본인들은 피난을 가더라도 우리는 남아서 오히려 환영을 해야 돼. 또 설사 폭격이 위험하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텅 빈 서울에 남아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해."
라고 하며 끝까지 버티었다.
'저울추'라는 별명- 55
선생은 언제나 냉방에서 지냈다.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이다. 그런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안히 산단 말인가."하는 생각에서 였다.
차디 찬 냉돌 위에서 꼼짝않고 앉아 생각에 잠길 때면 선생의 자세는 한점 흩어짐이 없었다.
어찌나 꼿꼿했던지 선생은 어느새 '저울추'라는 별명이 생겼다.
차디 찬 냉돌에 앉아서 혁명과 선(禪)의 세계를 끝없이 더듬는 저울추였다.
- 편집 보강(김영만) 전법위원 -
출처: 만해기념관(http://www.manhae.or.kr/)
댓글목록
김영만님의 댓글
김영만 작성일
생활 속 철저하신 반일정신과 실천행의 만해선사,
죽음도 두렵지 않는 구국정신의 만해선사,
선(禪)을 통한 불교적 혁명을 추운 냉방에서
평생을 정진하신 만해선사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