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선사 일화 속 사상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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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만 작성일12-11-12 10:57 조회3,485회 댓글2건본문
丹齋와 萬海(단재와 만해)- 61
1936년 선생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묘비 건립을 계획하여 비문은 만해 선생이 짓기로 하고 글씨는 오세창(吳世昌) 선생이 쓰기로 하였다.
그러나 애국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으므로 비문은 중지하고 다만 단재신채호지묘(丹齋申采浩之墓)라고만 새겨진 묘비를 선생의 친척들을 통하여 세우게 했다.
그리고 1942년에는 단재의 유고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와 《상고문화사 上古文化史》 등의 간행을 위하여 만해 선생은 신백우(申伯雨), 최범술(崔凡述), 박광(朴洸)들과 함께 사업에 착수했다.
만해 선생과 함께 단재 선생의 문헌을 수집 간행하려던 최범술은 경남 경찰부 유치장에서 구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선생은 최범술을 면회하기 위하여 생화(生花) 한 다발을 가지고 경찰부를 찾아 면회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자, 갖고 갔던 꽃다발을 그들 앞에 뿌려버리고 말았다.
최범술이 출감한 뒤 선생에게 자신이 갇혀있을 때 왜 꽃다발을 가져왔느냐고 물었더니 입감(入監)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대답했다.
선생의 이 말은 진지하면서도 격조가 높은 사랑의 표현이었다.
- 편집 보강(김영만) 전법위원 -
출처: 만해기념관(http://www.manhae.or.kr/)
댓글목록
김영만님의 댓글
김영만 작성일
겁외의 사상으로 일상에서
삶을 보여주신 만해선사 _()_
백낙종님의 댓글
백낙종 작성일
만해선서의 기개에 부끄러울뿐입니다.
주위의 조건들과 대불청관계속에서의 어려움을
대불청 작금의 현실을 어찌해야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