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스님 66주기. 참석명단 및 함께 생각해 보자고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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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창호 작성일10-06-30 17:10 조회4,626회 댓글0건본문
날씨가 무덥습니다. 오늘은 촉촉한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는것 같습니다.
월드컵 16강도 끝나고 이제는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와 왔는데....
저는 아직도 나른한것이 결승전도 끝나야 여름 탈출을 할수 있을려나 ....ㅋ
저는 불청활동 만 8년동안 부끄럽지만 만해스님 유택을 찾아 뵙지를 못했는데
올해는 다행히 지각참석을 하여 너무나도 늦어지만 선배님들과 함께 망우리공원
묘소 참배를 마쳤습니다.
(우리들이 할수있을것 같은 작은일 : 만해스님 역사탐방 순례길 만들어 봐요)
당일코스 : 서대문 구치소 / 성북동 심우장 / 망우리 유택 /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오전 10시) (오전 12시) (오후 2시 ) (오후 4시) (오후 7시 마감)
1박 2일 코스 A형 : 당일코스 + 백담사 및 만해마을 탐방
1박 2일 코스 B형 : 당일코스 + 홍성 만해스님 생가 및 역사유적지 탐방
내년에는 많은 법우님들이 함께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유구무언인 게으른 청년불자인 저의 생각보다는 선진규 대선배님께서
전에 만해스님 묘소참배 관련의 글로 대신 하겠습니다.
만해스님 66주기 참석자 명단 :
정웅정 중앙회장님 .구재완 . 김희영. 조장래 자문위원님
박찬웅 상훈위원장님 . 박남주 부회장님 (선배님 그룹)
현일환 사무총장님, 김두환 조직팀장님 , 박형석 조계사 청년회 미디어 팀장님 , 김동완 교계협력팀장, 진창호 정책개발팀장님, 이경민 정책기획실장님 , 손동대 총무부장님 (현역 나이테순.. ㅋ)
선진규④ 버려진 만해스님 묘소에 실망
나는 만해스님의 묘소 약도를 갖고 곧장 망우리 묘지로 향했다. 큰 스님의 무덤인데 표시가 뚜렷하게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약도와 비교해가며 주위를 차근히 살펴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찾아 해매다 작은 묘소하나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40cm 가량 높이의 돌비석에 ‘한용운지묘(韓龍雲之墓)’라고 쓰여 져 있었다. 만해스님의 묘소인 것이다.
그러나 묘소 비석은 밑 부분이 깨어져 있는 채로 방치돼 있어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긴급하게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간부들에게 묘소에 다녀온 사실을 알렸더니 모두 가만히 있을 일이 아니라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방치된 만해스님 묘소를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인근에 있는 한국일보 사회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제보했다. 다음날 아침 3월15일 한국일보 사회면에 ‘기미년 다시 돌아왔건만, 쓸쓸히 버려진 님의 침묵’이란 제목의 톱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가 나간 후 청년회 사무실 전화는 불이 났다. “묘소 가는 길을 알려달라”, “묘소이장에 동참하겠다” 등 문의가 빗발쳤다.
외면당한 ‘님의 침묵’…세인들에 환기
특히 각 언론기관에서는 만해스님의 사진과 보도자료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이에 급히 한복을 차려입은 만해스님의 사진 200여 장을 인화해 각 언론사로 보냈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만해스님의 표준사진이 됐다고 한다.
3월1일 만해백일장은 조계사 경내에서 열렸는데, 700여 명의 문학도가 참석해 대성황을 이뤘다. 1979년 다시 돌아온 기미년 60주년은 완전히 만해를 위한 기념행사가 되다시피 했다.
어찌 보면 홀로 총독부를 보지 않겠다고 북쪽으로 등을 지고 앉은 심우장에서 님을 찾는 수행으로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 조국해방을 보지 못하고 쓸쓸히 입적한 만해스님에게는 늦었지만 당연한 보답인 것이다.
당시 각종 언론에서 만해스님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올 무렵 원호처(현재 보훈처) 사무관 두 명이 우리 사무실에 찾아와 “원하는 데로 해드릴 테니 제발 이제부터는 언론에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내용인즉 독립유공자 관리는 자신들이 맡고 있는데, “어떻게 만해스님과 같은 독립유공자 묘소를 방치했냐”며 상부로부터 호된 경책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언론기관이 앞 다퉈 보도한 것은 그동안 하지 못한 스님에 대한 국민적 존경심의 표현임으로 우리가 말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망우리 묘소에 올라가는 길에 만해스님 묘소 이정표와 스님을 기리는 기념공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원호처 발칵…기념사업회 구성 이어져
그리고 3일 후 전화가 왔다. 그들은 만해스님의 공원을 만들 수 있는 부지를 구해보라고 했다. 그래도 이런 일을 서두르면 그릇 치는 만큼 불교계 여러 지도자들과 상의해 진행해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당시 이후락 씨가 회장으로 있던 전국신도회가 중심이 돼 만해기념사업회를 구성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러한 보도가 나간 후 그렇게 찾던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이후락 회장이 전담하게 됐다고 하니 모두 잘 할 것이라고 안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등 권력의 실세였기에 뭐든지 이룰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우리 청년회 간부들은 일언반구 없이 기습적으로 이뤄진 기념사업회 구성에 씁쓸했지만, 잘됐다고 생각하고 전국신도회가 추진하는 만해기념사업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렇게 급조된 기념사업회가 그간 언론들의 만해스님 관련 보도를 인용, 성급하게 꾸며낸 참모들의 약삭빠른 역할이라 생각하니 앞으로 이룩될 일들이 염려스러웠다.
선진규 / 봉화산 정토원장 불교신문 2454호/ 8월27일자]불교신문 [2008-08-23]
일반적으로 스님이 입적하면 부도탑과 비석을 절에 모신다. 현재 만해스님의 묘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치돼 있으며 비석은 탑골공원에 세워져 있다. 이는 스님에 대한 후학들의 도리가 아니라는 게 한결같은 목소리다.
불교계는 늦었지만 만해스님과 인연이 있는 곳에 부도탑과 비석을 모셔야 한다는 여론이다. 더 이상 스님을 ‘절집 아닌 바깥’에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난 1965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학생들이 통도사 경봉스님을 친견한 적이 있다. 경봉스님은 대학생들에게 “어째서 이와 같은 분이 아직도 공동묘지에서 비석하나 없이 헐어져가고 있느냐”면서
“학생들이 주동이 돼 기념사업을 신속하고 활발하게 추진해 달라”고 간곡하게 당부했다고 한다. 만해스님의 열반 64주기를 맞는 올해, 경봉스님의 말씀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신문/ 2008 7 - 9 홍다영 기자 원고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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