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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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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호 작성일10-08-16 11:47 조회4,5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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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궤 등 일제강점기에 반출돼 일본 궁내청에 소장돼있던 우리의 고서들이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로 국내로 돌아오게 됐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화끈하게 총리 담화에 포함됐으니 말입니다. 아직 어안이 벙벙해요. 4년 동안 추진해온 일이 마침내 이뤄졌어요."

2006년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를 구성해 의궤 반환운동을 주도해온 혜문 스님을 일본 총리 담화 이튿날인 11일 오후 서울 견지동 조계종중앙신도회 사무실에서 만나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일본 도쿄대에 소장돼 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명성황후 시해에 쓰인 칼인 히젠도(肥前刀), 고종의 투구와 갑옷 등 드러나 있지 않던 우리 문화재를 찾아낸 혜문 스님은 '문화재 환수 운동의 기인(奇人)'으로 불린다.

-'기적'이라는 표현이 맞나요.


"기적이죠.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문제가 종결됐다면서 '반환 불가' 입장을 고수했어요. 한국 정부나 국민들도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와는 달리 일본 궁내청 도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어요. 이런데도 반환이 결정된 것은 기적입니다. 일본 정부도 막판까지 부정적이다가 8월 6, 7일쯤에 결정했대요. 일본 황실에서도 암묵적인 동의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출가한 스님이 어떻게 조선왕실의궤 반환운동을 하게 됐습니까.

"인연이죠. 출가한 것도,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렇죠. 은사이신 철안 스님이 2003년 경기 남양주시 봉선사 주지로 부임한 뒤 산하 27개 전통 사찰의 문화재 조사를 저에게 맡겼어요. 그 때부터 문화재 제자리 찾기에 관심을 가졌어요. 그 과정에서 찾아낸 것이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던 현등사 사리구였어요.

또 하나는 한일협정 문서가 2004년에 공개됐는데, 제가 관심을 갖고 협정 당시 반환받은 1,432점의 문화재 목록을 일일이 확인해봤어요. 그 목록에 짚신, 막도장, 우체부 모자 같은 게 있는 거예요. 이런 거 돌려받고 '문화재 반환이 종결됐다'고 하는 게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분노가 일었어요. 저보다 먼저 이 목록을 대조해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면서 문화재 반환운동은 학자들이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결단을 내린 사람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지요. 이런 계기들이 작용해 저의 문화재 제자리 찾기가 시작된 거죠."

- 의궤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2004년 일본 교토의 고서점에서 일본인 학자가 쓴 <청구사초(靑丘史草)>라는 책을 뽑아 봤는데, 거기에 조선왕조실록이 도쿄대에 소장돼 있다는 것이 적혀 있었어요. 그동안 아무도 이것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2006년에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를 구성해 실록을 돌려받았어요. 그 실록이 오대산 사고에 있었는데, 오대산 사고에 어떤 문화재가 있었고 어디로 갔는지를 추적해보니 궁내청 도서관에 의궤가 소장돼 있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실록이 환수된 뒤에 바로 의궤 환수위를 구성했어요. 실록이나 의궤 같이 왕만이 볼 수 있는 물건을 어물(御物)이라고 하는데, 그런 물건들은 소장처를 스스로 결정한다고 해요. 실록의 경우 읽히기 위한 책이 아니라 기록해두기 위한 책으로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도 있어요. 그런 물건들이 저를 부른 것이라고 봐요."

- 의궤환수위 구성 이후 4년 간의 경과를 간략히 말씀해 주신다면.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반환은 미완의 성공이었어요. 도쿄대가 실록을 서울대에 기증함으로써 약탈자가 '선의의 기증자'처럼 돼버린 거예요. 그래서 2006년 9월에 의궤환수위를 구성하고 나서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 8월을 결정적인 시점으로 잡고 거기에 맞춰 환수 운동을 해왔던 거죠. 제가 보기에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한국 정부가 의궤 반환을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 요청하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의궤환수위가 지난 7월 20일부터 19일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정치권, 시민단체 인사들을 만나 이 문제를 일본이 자발적인 결정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총리 담화에 넣도록 도와달라고 설득한 것이 주효했던 것 같아요. 일본 의원 30여명을 만났는데 계파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 6명에게 이 문제를 전달했어요.

하지만 이건 우리 환수위의 입장이고, 달리 보면 의궤가 돌아오는 것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작용하는 인연들 때문이겠죠. 요새 제가 사람들에게 농담으로 말하는 게 있어요. 저는 코끼리한테 바늘을 꽂아놓고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건데 코끼리가 자연사한 거예요. 다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미미하나마 제가 바늘을 찌르고 있었던 것을 봤기 때문에 제가 한 것처럼 볼 수 있지만 의궤가 돌아올 때가 된 거죠."

- 스님께서 일본에서 의궤 반환 여론을 형성하려고 상당한 작업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반환이 성공하려면 이쪽이 아니라 일본에서 톱니바퀴가 돌아야 해요. 일조협회, 고려박물관 등 일본 시민단체, 의원들과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일본 공산당이 16석밖에 안 되지만 의궤 반환을 당론으로 채택해줘 큰 힘이 됐죠. 그 사람들이 다수 정당 의원들에게 영향을 미쳤어요."

- 아쉬운 점은 없었나요.

"경술국치 100년에 맞춰 뭔가를 준비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한일 간 협상 테이블에 의궤밖에 현안으로 올라온 것이 없었던 거죠. 만약 더 유능한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문화재 반환운동을 했더라면 더 많은 문화재가 돌아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준비를 하지 못했던 점은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또 하나 궁내청 도서 문제가 이슈화된 것이 2002년 해외전적조사위원회 발표를 통해서였는데, 당시 우리 학자들은 한일협정으로 이 사건은 끝났기 때문에 반환은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패배의식 때문에 반환운동으로 연결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 81종 167책의 조선왕실의궤 가운데 특히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를 많이 언급하셨는데요.

"실록과 달리 '의궤'는 말부터 어려워요. 어떻게 국민들에게 관심을 환기시킬까 고민하면서 3가지 의궤에 주목했어요.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는 명성황후를 죽이고 2년 2개월에 걸친 국장 기록까지 약탈한 일제라는 점을 부각시킬 수 있었고, '보인소의궤'는 조선 왕의 옥새를 만든 기록, '대례의궤'는 고종의 황제 즉위식 기록이라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웠던 거죠.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를 부각시키느라 <조선을 죽이다>라는 책도 썼습니다. 명성황후를 죽인 칼 히젠도를 찾아낸 것도 그 과정에서였어요."

- 상당히 장기적인 안목으로 일을 추진해오신 것 같습니다.

"제가 중이잖아요. 먹고 살 거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가능했겠죠. 2006년 가을 환수위를 출범시키고 나서 몇 달 동안 계획을 세웠어요. 한일 정상회담을 통한 반환, 국회를 통한 반환 결의안, 의궤를 소장했던 월정사의 점유권 침해를 제기하는 소송, 유네스코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 우리가 실패할 경우 장차 북일 수교 때 해결하기 위해 남북 공조를 하는 방법 등 다섯 가지였어요. 올해 8월에 맞춰 스케쥴을 세워놓고 하나씩 실천해 98%를 실천했어요. 4년 동안 일본에 간 것 만 40번 가까이 됩니다."

- 힘들었던 점은.

"처음에는 저를 미친놈이라느니, 돈을 모을 요량으로 한다느니, 되지 않을 일로 사람을 현혹하는 광인이라는 둥 비난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것이 제 신념에 의한 사상운동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어요."

- '사상'이라니요.

"제가 하는 운동을 '문화재 제자리 찾기'라고 하잖아요. 이 '제자리 찾기'는 제가 이해하는 불교와 관련이 있어요. 불교라는 게 없는 걸 찾는 게 아니라 있는데도 왜곡되어 있는 마음을 제자리 찾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 저는 문화재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제자리 찾기 운동을 한 거고, 그것이 문화재의 형태로 나타난 거죠."

- 의궤 반환 가능성에 의심이 드신 적은 없습니까.

"2006년 10월 일본 황궁 안 궁내부 도서관에서 의궤에 '조선총독부 기증'이란 직인이 찍힌 걸 보고 반환될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돈 주고 가져간 것도 아닌데 돌려줘야 되지 않겠나 하고 생각했어요. 올해 4월에는 일본 의원 6명에게도 직접 가서 의궤를 보라고 부탁해서, 그들이 가서 봤어요. 총독부로부터 매입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거예요. 이것은 기증이란 형식으로 뺏은 것이죠. 우리 학자들이 총독부가 기증했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가져갔다고 말하는데 이게 바로 식민지 근성이라고 봐요. 일본도 총독부 기증이라는 형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돌려주는 거예요."

- 이번 반환 운동을 의병운동에 비유하신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를 의병의 나라라고 하잖아요. 이번에도 정부는 끝까지 의궤 반환을 공식 요청하지 않았어요. 정부가 포기한 실록과 의궤를 국민들이 의병을 조직해서 일본 정부와 협상을 해서 가져오는 것이니까 의병의 전통에 속하는 것이죠."

- 의궤 반환 후 보관 등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간 총리 담화에 의궤 외에 다른 고서들도 반환하겠다고 했는데 우선 목록을 확인해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노력해야 되겠죠. 그리고 의궤가 돌아오면 소장처 문제가 제기될 텐데, 국민적 합의에 의해 역사적 의의가 살아나는 곳으로 결정되기 바랍니다."

혜문 스님은 출가 수행자라는 이유로 출가 이전의 약력을 밝히기를 극구 사양했다. 1998년 봉선사에서 출가한 그는,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2005년 삼성 리움박물관을 상대로 '현등사 사리구 반환 운동'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2006년부터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 간사,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을 맡아왔다. 현재 봉선사에서 수행 중이다.

한국일보 2010-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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