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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으로 어떻게 회향과 업장소멸을 할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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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창호 작성일10-10-14 16:56 조회6,304회 댓글1건

본문

안녕하세요. 정책개발팀장 보인 진창호입니다.

첨부파일에  " 한국불교유신론 다시쓰다" 토론회 전체 자료를 업하려고 하니 용량이 커서 조계사청년회 나누고 싶은글에 가시면 전체 자료가 있습니다.

필요하신 법우님이나 불자님께서는 유용한 자료가 될듯 합니다.
저도 나름 한국불교 新 유신에 대해 고민을 해보고 있으며
금강스님의 21세기 한국불교유신론을 소개합니다 . ^^


" 세상에 가장 큰 죄악은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 사음을 행한 것이 아니다. 불조의 혜명을 잘 계승하여 법륜상전 불일증휘를 이루지 못할망정 그 혜명을 흐리게 하거나 나아가 꺼뜨리는 일처럼 큰 죄악은 없을 것이다." 본문 내용중에서......






21세기 한국불교유신론을 제창한다


                                                         금강(대중결사 사무총장·미황사 주지)



 
1. 오늘날 한국불교에 대한 유신의 필요성

 
오늘날 한국불교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다. 출가자는 양적으로 점차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결코 수월성을 갖지 못한지 오래다. 또한 한국의 승가는 존경받기는커녕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흐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남 등 일부지역에서만 스님들이 나름대로 행세를 할 뿐 그 외에 지역에서 승려의 위상을 땅에 떨어지고 있다. 이러다가는 또 언젠가 스님들이 호남과 수도권에 발을 붙이지 못하는 일이 닥칠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물리적 규제에 의한 것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저 조선의 불교 억압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난 100년간 한국불교는 많은 변화와 큰 발전을 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발전이 시대적 흐름의 자연스러운 산물인지, 아니면 불교 구성원들의 노력에 의한 것인지는 따져볼 문제다. 그 기간에 한국불교는 적어도 영남을 제외한

호남과 수도권에서는 제3의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역적인 면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정부, 정치, 경제, 교육, 문화예술, 사회, NGO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불교는 허울 좋은 전통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 제3종교로 전락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살기가 점점 불편해지고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분명한 것은 현재의 한국불교가 반드시, 또 철저하게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한국불교는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더없이 초라해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2. 유신 및 논의의 방법

올해는 만해스님이 불교유신론을 집필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한 세기 전 만해스님이 당시 한국불교의 구태를 파괴하고 유신함으로써 각종 외세 앞에서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기만 하던 한국불교를 되살리고자 하였듯이, 올해 우리 청정승가를 위한 대중결사도 위기에 처한 오늘날 한국불교를 구하기 위해서 21세기적 환경에 부응하는 21세기 판 한국불교유신론을 제창하고자 한다.

21세기 판 한국불교유신론을 제창하기 위해서는 설득력 있는 잣대를 가지고 오늘날 한국불교의 고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복합적 원인을 있는 그대로 모두 드러낸 다음 과감하게 병든 부위를 도려냄으로써 새살이 돋아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첫째, 그 대표적 선례라 할 수 있는 만해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의 의의와 역사적 교훈에 입각하여 20세기 한국불교유신을 단행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만해스님의 불교유신론은 일자 일획 그대로 오늘날 한국불교를 진단하는데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한국불교는 아직도 만해가 제시한 불교유신을 실행하지 못 했다는 점이이다.

둘째, 오늘날 한국불교가 처한 객관적인 조건과 21세기 한국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고려하여 21세기 한국불교가 해결해 나가야 할 시대적 과제 및 불교적 과제를 제시한 다음, 이를 수행하기 위한 한국불교유신을 시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21세기 불교는 20세기 초와는 다른 사회적 상황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가 요구하는 과제는 20세기 초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21세기판 불교유신론을 위해서는 21세기적 상황이나 21세기의 시대적 과제에 부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3. 만해스님의 유신론을 활용한 21세기 한국불교유신

1) 참선 수행에 대하여

참선의 문제부터 접근해 보자. 만해스님은 참선의 문제를 대함에 있어 당시 불교계의 참선하는 부류들이 염세와 독선에 빠져 있다고 보았다. 이는 부처의 가르침이 구세의 가르침이요, 중생제도의 가르침임을 실천하지 않음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했다.

만해스님은 당시 사찰마다 선실(禪室)이 거의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으며, 선실을 선을 일으키는 선불장으로 삼지 않고 절의 명예의 도구를 삼았고(寺刹榮譽之具), 선실을 이익을 낚는 도구로 삼고 있다(射利之具)고 질타했다. 선객의 총수 10명 중 진정한 선객은 1명에 불과하고, 먹기 위해 들어온 자가 2명이요, 어리석고 게으른데다가 먹기 위해 들어온 자가 7명이나 된다고 비판했다.

만해스님은 참선을 새롭게 뜯어 고치는 방법으로 각 절의 선실 재산을 합쳐서 우선 한, 두 개의 큰 규모의 禪學館을 마땅한 곳에 세우고, 선의 이치에 밝은 사람 몇 명을 초청하여 스승으로 삼으며, 참가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僧俗을 가리지 않고 다 수용하되 모집할 때에 일정한 방법으로 시험을 거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선을 닦는 데 있어서는 다 일정한 시간적 통제가 있어서 산만에 흐르지 못하게 해야 하며, 다달이 혹은 청강을 하기도 하고 토론을 벌이기도 하여, 한편으로는 참선의 정도를 시험하고, 한편으로는 각자의 지식을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상당한 시일이 지나 크게 얻는 바가 있을 경우에는 마땅히 저서를 내어서 세상에 공표하도록 하자고 주창했다. 그리고 선방에 들어갈 형편이 못 되면 각 사찰에 참선 모임을 만들어 수행 풍토를 조성하자고 하였다. 사찰의 행정, 보직을 맡은 승려를 위한 제안이다.
각론에서 불가피하게 일정한 차이는 있지만, 만해의 참선수행 풍토 비판과 대안 제시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선방에는 정말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부할 수 있도록 공부 점검 등의 혁신적인 제도의 보완이 절실하다.

둘째, 선방에는 반드시 명안종사를 모셔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조실과 방장, 선원장을 모시는 데 문중이나 파벌의 개념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법에는 문중이 없는 것이다.

셋째, 사교입선을 정확히 지켜야 한다. 즉 무조건 책을 보지 말고 화두만 들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공부하고, 그 바탕하에 참선으로 들어가는 선교겸수(선교학후정진)의 수행차제를 제정해야 한다.

넷째, 수행을 해서 얻은 바가 있다면 반드시 그 득처를 대중들에게 회향하는 것을 의무화해야 한다. 그것이 만해스님의 주장처럼 저술이 되었든, 아니면 대중 참선법문이 되었든 누구나 공부한 것을 널리 중생을 위해 회향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2)염불당에 대하여

유신론에서 수행의 문제로 거론한 것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염불당의 폐지라고 할 수 있다. 파격성에서도 가장 과격하기 때문이다. 유신론에서 만해스님이 제기한 염불당의 문제는 중생들의 거짓 염불을 폐지하고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해야 한다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만해스님 당시 보편적으로 행하였던 염불은 왕생 정토사상에서 비롯된 기복적 성격이 짙은 칭명염불이었을 것이다. 만해는 칭명염불을 통한 왕생정토는 인과응보를 중심으로 한 불교의 교리 상에서 절대 불가하다고 설파했다. 만해스님이 말하는 참된 염불은 무엇인가?
 
“부처님의 마음을 염(念)하여 나도 이것을 배우고, 부처님의 행을 염하여 나도 이것을 행해서 비록 일어, 일묵, 일정, 일동(一語, 一默, 一靜, 一動)이라도 염하지 않음이 없어서 그 진가(眞假)와 권실(權實)을 가려 내가 참으로 이것을 소유한다면 이것이 참다운 염불(念佛)인 것이다.”
 
만해스님이 주장하는 참다운 염불은 이처럼 부처의 근본사상, 불교정신을 생각(궁리, 체득)하여 이를 실제 삶의 현실에 실천하는 것을 의미했다. 실천은 하지 않고 입으로만 부처를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는 점을 만해는 분명히 했다.

또한 부처의 가르침을 행함에 있어 방편이라는 차원은 필요하지만 그 폐단이 극에 달하였으며,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염불당에서 이루어지는 기복일변도의 빗나간 수행이었음을 지적했던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에서의 염불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염불만일회와 같이 염불 신앙으로 신앙공동체를 지향하는 사찰 및 신행 단체도 적지 않다. 설령 없애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여도 그렇게 처리될 수도 없다. 최근에는 참선, 간화선 위주의 수행에 어려움을 느낀 신도들이 오히려 염불 신앙으로 회귀하는 경향도 있다.

때문에 현재 한국불교에서 보편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염불신앙의 형태는 일단 긍정하고 유신론에서 제기한 참다운 염불 신앙이 구현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기복적 칭명염불을 가능한 자제토록 승려부터 철저하게 교육하고, 염불 그 본래의 의미를 되찾도록 방향을 크게 전환하는 일대전기의 마련이 필요하다.
 
3) 교육에 대하여

만해스님은 교육이 보급되면 문명이 발달하고, 그 반대로 교육이 보급되지 못하면 문명은 쇠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만해는 배움에 있어서는 지혜(자본), 사상의 자유(법칙), 진리(목적)의 세 요소가 절대 긴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의 승려들이 세 요소 중에서 사상의 자유가 가장 결핍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전통적인 승려 교육의 특색인 연구와 논강도 그 당위와 실제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질타하였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만해는 승려교육의 급선무를 보통학, 사범학, 외국유학으로 대별하였다. 만해스님의 주장은 승려 지도자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수 있다.

우리가 만해스님의 교육 혁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교육의 시급성을 강조하면서 불교계의 노후하고, 부패하고, 완고 비열한 무리가 새로운 교육을 저지하고, 구습을 고수할 뿐 새로운 진전이 없다고 하였던 점이다.

조계종은 기초적인 교육기관인 행자교육원의 설립, 승려재교육 프로그램의 도입, 21세기를 내다보는 교육 내용에 대한 정비 등을 조속히 완결 짓는 것을 긴급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더 이상 승려들이 3무, 즉 무위도식, 무식, 무사안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는 승가에서 사라지게 해야 한다.
 
4) 포교에 대하여

만해스님이 제기한 포교 문제는 기본적으로 경쟁, 우승열패, 약육강식이라는 현실인식을 갖고 있는 사회진화론의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만해스님은 조선불교가 유린된 원인은 세력이 부진한 탓이며, 세력의 부진은 가르침이 포교되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가르침이란 종교의 의무의 선(線)과 세력의 선이 함께 나아가는 원천이다.” 이처럼 불교의 세력 부진은 불교가 포교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만해스님의 시각이었다. 그리고 포교는 종교의 의무임을 간과한 당시의 불교풍토에 대한 질타로 이어졌다.

100년 전 만해스님이 지적한 포교부진의 이유, 즉 승려의 낙후성, 신도들이 소수의 여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 등은 오늘날 일점일획 고치지 않아도 그대로 적용될 정도다.
만해스님은 포교를 하기 위한 기본자세로 열성, 인내, 자애를 중요하게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포교는 불교의 흥망과 승려의 생존을 담보하는 지름길로 보았으며, 포교의 방법으로 연설, 신문·잡지에 기고, 역경, 자선사업 등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당시 불교계에서는 이런 방법이 전무하였다고 개탄하였다. 물론 포교의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연설로 포교하고, 미디어를 통해 포교하고, 경전을 번역하여 널리 유포시켜 포교하고, 자선사업을 일으켜 포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한국불교 포교의 질적, 양적인 팽창과 발전이 아주 없지는 않다. 불교방송, 불교텔레비전, 불교신문을 비롯한 수많은 불교계 신문, 불교잡지, 사찰에서 나온 발간물, 각처에서 자생적으로 진행되는 법회 등이 그런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경쟁관계에 있는 종교들과 비교하면 불교계의 수준은 한참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니 내세울 것도 없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포교의 원칙, 정신, 방법 등에 대한 이론적인 재정립과 현대 산업사회 및 그 변동에 걸맞은 포교 전략의 수립이다. 승려들만이 포교를 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버려야 한다.

일선에서 포교를 하고 있는 재가포교사 양성 시스템을 보완하고, 그들에게 승려에 버금가는 권위와 권한을 주어야 한다. 포교사들은 신분과 활동의 거점을 보장받지도 못하고 있다. 출가자의 수가 해마다 줄어들고 있고, 고령의 출가자들이 늘어나는 현실에서 포교현장을 승려에게만 맡기는 시스템은 시대착오적이다.

21세기 한국불교는 포교를 다른 모든 것의 앞에 두어야 하며, 이를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인터넷 시대에 맞는 포교에 종단이 거종단적으로 나서야 한다. 인터넷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 인터넷 시장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불교의 현실에 대한 심각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인터넷을 포기하는 것은 어린 불자, 청년불자, 젊은 불자, 장년불자, 일부 노인불자를 포기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대를 앞서가지는 못할망정, 따라가는 시늉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둘째, 정법을 중심으로 포교해야 한다.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비불교적인 행위들은 과감히 추방해야 한다. 오직 정법을 중심으로, 방편법은 가능한 최소한으로 하는 원칙의 수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차제에 정법과 사법을 가리는 종단적 기관도 만들어야 한다.

개신교의 경우 끊임없는 이단 논쟁을 벌이며 나름의 정통성을 찾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불교계에서는 부처님의 이름으로 무당 푸닥거리 짓을 해도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넘겨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인도에서 불교가 왜 망했는지를 뼈아프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포교 잘하는 스님이 종단의 요직과 중요한 사찰을 맡아야 한다. 포교는 종교의 생명줄이다. 그 생명이 지금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생명을 지키고, 강하게 만들고, 확산시키기 위해 포교를 잘하는 스님을 책임 있는 자리에 모셔야 한다.

넷째, 문화재관람료를 폐지해야 한다. 문화재관람료 징수로 인해 한국불교는 지역주민은 물론이고 국민들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누구나 절에 들어갈 때 기분이 좋지 않다. 사찰이 중국사찰처럼 관광지의 기능만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라면, 또 수행도량임을 인정한다면 어떤 명분으로도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 문화재 관리는 국가에서 직접 맡아서 관리하도록 위임하고, 스님들은 수행과 공부, 포교에만 전념해야 한다.
 
5) 사원의 위치에 대하여

“그러면 사찰의 위치를 고칠 수 있겠는가. 세 가지 방책이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산속에 있는 사찰 중 오직 기념할 만한 몇 곳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한결같이 모두 철거한 다음 새로 각 군(郡), 각 항구(港口)의 도회지에 세운다면 이는 상책(上策)일 것이다.

그리고 그 크고 아름다운 사찰은 남기고, 작은 것과 크고 황폐한 것은 철거하여 큰 도회지에 옮겨 지으면 이는 중책(中策)이 될 것이다. 또 다만 암자만을 폐지하여 본사에 합하고 한 도(道) 혹은 몇 개의 군(郡)에 있는 사찰들이 합동하여 요지에 한 출장소를 두어 포교, 교육 등의 일을 처리할 경우, 이것은 하책(下策)이다. 그리고 이밖의 것은 방책도 아닌 것이 된다.”
 
이 같은 만해스님의 주장은 지금까지 근·현대불교 100여 년간 거의 이행되지 않았다. 기존 사찰과 암자를 폐지하지 않았고, 일개 사찰 혹은 본사급 사찰들이 도회지에 사찰 혹은 포교당(소)을 내어 포교 활동에 나서는 정도가 다였다.

만해스님의 주장은 승려들의 의식과 사업에 불리를 끼치는 사찰의 위치를 근원적으로 변동시키자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만해스님의 사원의 위치를 변혁시키자는 주장은 다시 말하면 도회지 중심의 불교, 승려 의식의 철저성을 지키자는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승려들이 도회지에서의 활동이 빈번해지면서 승려의 세속화, 세력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은 만큼 세밀한 대책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산중의 사찰을 없앨 필요는 없지만, 스님들의 대부분은 이제 도시로 나와야 한다. 그것도 인구의 절반이 몰려 살고 있는 수도권으로 대거 나와야 한다. 교화할 대중이 많은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 부처님의 전도명령을 받고 각지로 찾아가는 부처님의 제자들처럼 중생들 곁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불교를 가르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스리랑카와 대만이 오늘날 튼실한 불교국가로 굳건히 바로 선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스님들의 헌신과 봉사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1세기 한국 승가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의무이자 덕목이다.
 
6) 종단 운영에 대하여

앞서 포교에 대해 언급하면서 강조했거니와, 종단의 대표자를 포교 잘하는 스님으로 바꾸는 것을 최우선 개혁의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 포교 잘하려면, 고단해야 하고,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하며, 늘 가난하고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다. 이런 자리에 무위도식, 무사안일의 기운에 젖어 있는 기존의 권승·정치승들이 몰려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몇몇 세력이 종단의 모든 권한과 돈줄을 움켜쥐고 호의호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지금의 종단 정치는 인사의 제일덕목으로 포교 제일주의가 정착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포교를 조금이라도 더 잘하기 위해 밤낮 없이 노심초사해야하는 자리에 검은 마음을 가진 빗나간 명자승려들이 욕심을 낼 리는 없기 때문이다. 포교원장이든, 총무원장이든, 교육원장이든, 본사주지든, 큰 절의 주지든 모두 포교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자리를 맡아야 한다.

특히 종단을 세속의 정치판보다도 더 혼탁하고 지저분하게 만드는 온상인 중앙종회와 같은 기구는 당장이라도 없애야 한다. 종단의 많은 구성원들이 중앙종회가 왜 필요한 지 도무지 납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종단의 행정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종회가 필요하다면, 포교 잘하는 스님이 종단의 중앙종무기관 대표가 되는 순간 존재의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포교 잘 하는 스님은 견제할 것도 편을 나누어 다툴 일도 크게 없는 스님이기 때문이다.
 
7) 승려의 인권에 대하여

만해스님은 승려 인권의 회복의 방안으로 승려의 생산활동을 제기했다. 승려 인권은 생산에 참여하여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해결할 때부터 시작된다고 만해 스님은 보았다. 만해스님은 조선 후기 이래 승려가 압박을 받고, 인간 취급을 제대로 받지 않은 것은 일하지 않고 먹고 입은 것을 주된 원인으로 보았다.
 
“우리들이 길이 전날의 구속을 벗어 던지고 사람 고유의 인권을 회복하고자 할 것 같으면 무엇보다도 스스로 생산하여 自活할 필요가 있는 것이니, 굴욕의 원인을 제거한다면 누가 능히 조금이나마 능멸할 리가 있겠는가.”
 
경제적 완전 자립을 기하지는 못하여도, 최소한 정신적인 각성 차원에서도 승려의 노동, 선농불교는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4. 21세기 한국불교의 시대적 과제에 부합하는 한국불교유신론

첫째, 20세기가 근대를 지행했고 모든 사회가 근대화를 추구한 시대였다면 21세기 인간사회는 탈근대를 지향하고 있다. 20세기의 핵심가치였던 성장, 발전 등과 같은 개념은 사라지고 느림, 행복 같은 개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국불교는 물질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한국불교는 한국불교 고유의 수행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이러한 물질주의적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21세기 탈문질주의문화를 선도해 나가야 한다.

둘째, 20세기가 국가와 행정권력이 주도하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점차 시민권력이 부상하는 시대로 변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불교는 시민권력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국가권력이나 지방행정기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종단내적으로도 공식적 소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반면에 오늘날 한국불교는 여전히 사회문제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은 철저하게 파괴되어야 한다. 대신 정치적 관심이 국가기구에서 시민사회로 옮겨져야 한다.

셋째, 20세기의 문화적 코드가 경쟁, 약육강식, 우승열패였다면, 21세기 사회환경은 정치적 민주화, 시민사회의 확대, 문화적 다양성 등으로 변하면서 느림, 상생, 연대 등과 같은 가치가 문화코드로 자리 잡을 것이다. 또한 세계화와 정보화가 진전됨에 따라 사회변화의 속도와 불안정성은 매우 커짐에 따라 유연성이 중요해진다. 따라서 21세기 한국불교는 외부와의 연대나 상생에 관심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넷째, 20세기초와는 달리 21세기의 시대적 과제는 당연히 복지다. 한국불교는 노인복지와 같은 기존의 사회복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은 물론 사회적 기업이나 해외원조 및 구호와 같은 새로운 분야로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렇지 많다면 한국불교의 사회적 정당성은 점점 더 허약해지고 그럴수록 한국불교의 존재감은 점점더 약화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21세기 인류문명은 환경문제를 여하히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을 정도로 환경 및 생태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한국불교는 다른 어떤 종교사상보다도 환경 및 생태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에 가장 적합한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다. 오직 가르침을 회향하는 실천만이 요구된다.
 
5. 나가는 말
 
이상으로 21세기 한국불교유신론을 제안해보았다.

이런 제안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검토해야 하고, 가능하면 여론조사 등을 통해 종도들의 의견을 묻고 여론에 근거한 제안이 되었어야 더 바람직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21세기 한국불교유신론이 완전하여 일점일획 바꿔서는 안 될 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승려로 살아가며, 일선포교의 현장에서, 선방에서, 도시와 시골에서 살아온 현장의 경험을 토대로 불교유신론을 집필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현재의 한국불교를 진단하고 잘못된 점을 반성하며, 그 개선점을 찾기 위한 오랜 고민의 결과임을 밝히고자 한다.

한국불교가 21세기에는 한국사회에서 지도적 위치를 회복하고, 나아가 국민들에게 편안하고 믿음직하며 완전한 귀의처로 거듭나고자 한다면, 오늘 제시한 21세기 불교유신론보다도 더 과격하고 혁신적인 안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세상에 가장 큰 죄악은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 사음을 행한 것이 아니다. 불조의 혜명을 잘 계승하여 법륜상전 불일증휘를 이루지 못할망정 그 혜명을 흐리게 하거나 나아가 꺼뜨리는 일처럼 큰 죄악은 없을 것이다.

오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의 불교도, 특히 승가는 불조의 혜명을 흐리게 하는 두려운 공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성충이 되듯이, 편안하고 감미로우며 배부르고 등 따스한 아지랑이 같은 허울에서 벗어나 가시밭길, 진흙밭길이라도 그 길로 떨쳐 일어서야 한다.
 
불기 2554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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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하님의 댓글

전수하 작성일

여러가지 논을 통해 유신의 필요성을 말씀 하셨지만 최종적으로는 무신론과  인연법을 체제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신론의 기본은 개신교의 유신론.. 즉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의 존재만 부각 되거든요.. 쉽게 말해서 사형틀이 종교의 주체가 되도록 만든다는게 엿같은 사상의존재인데  그게전부로 비춰지고 그게 전부로 인식시켜지고 있는 현실이 더럽다는 겁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공을 받아들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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