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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배영진 작성일10-10-06 10:47 조회4,2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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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놓치면 당신 죽어"... 점쟁이 때문이었어?
[중년의 사랑⑦] 출가 고민하던 나를 속세로 끌어들인 남편
10.10.05 16:12 ㅣ최종 업데이트 10.10.05 16:12 00050986.jpg김현자 (ananhj)

"엄마아빠도 저렇게 연애하고 그랬어?"

"아빠도 엄마한테 저렇게 고급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치면서 프러포즈하고 그랬나? 아닌가? 공원에 촛불 켜놓고 이벤트 하고 그랬나?"

"엄마아빠도 결혼을 하긴 한 건가? 아참 결혼했으니 우릴 낳은 거지."

 

올해 중 3인 딸은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엄마아빠의 연애와 결혼에 구체적인 관심이 많아졌다. 드라마에서 연애나 결혼에 관한 장면이 나오면 '별 걸 다' 시시콜콜 묻기 일쑤다. 딸에 의하면 엄마아빠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부다.

 

결혼사진 한 장 걸려있지 않은 것도 이상하고, 결혼기념일이란 행사(?)를 치르는 걸 본 적도 없고, 제 친구들 엄마 손에 예사로 끼어있는 결혼반지 하나 엄마 손에 끼어있지 않으니 대체 결혼을 하긴 한 건지, 결혼을 한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결혼을 한 건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에, 불나기 전에 말이야. 결혼사진 걸려 있었잖아! 니가 기억 못하는 거지!"

"그래?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런데 그거 결혼식 사진 맞나? 저 사람들(어떤 드라마의 스튜디오 연출 결혼사진 장면을 보다가)처럼 남 보여준다고 일부러 그냥 찍은 것 아닌가?"

 

결국 몇 년 전, 화재 이전 결혼사진이 걸려있던 벽의 풍경을 기억하게 하는 것으로 결혼사진에 대한 의문은 풀렸지만, 아이는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은가 보다.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는가?', '누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는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다 왔는가?' 등등 연애와 결혼에 대한 별별 것들을 묻고 캐묻는 걸 보면.

 

엄마아빠 결혼한 거 맞거든, 한번 들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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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의 화재 현장에서 건진 몇장의 결혼 사진 중에서
ⓒ 김현자
icon_tag.gif중년의 사랑

그러고 보니 우리가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나? 두 번째 화재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몇 년 동안 살기 워낙 바빠서, 돈과 치열한 전쟁 중이라 결혼 몇 년 차인지 헤아리는 것도,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것도 잊고 산 것 같다. 결혼 한 지 1년 후에 생긴 큰 아이가 올해 고3이다. 그러니까 결혼한 지 20년이나 됐다는 말이네? 맞나? 

 

조계사에서 매주 수요일에 모임을 가졌던 한 청년 불자 모임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을 따르는 여자 회원들이 많았는데 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법회에 언제나 늦었기 때문이다. '좀 서둘러 오면 안 되나? 제까짓 게 선배면 다야? 선배면 더 일찍 나와야지'라며 욕하기도 했다. 나중에 안 일인데 그때 남편은 자동차 엔진 첨가제를 수입하여 지방에까지 납품하기도 했던지라 여차하면 늦는 경우가 많았단다. 어쨌든 못마땅했다.

 

내가 청년 불자 활동을 하던 80년대 말에는 연말이면 직접 쓴 연하장을 보내곤 했었다. 부처님 오신 날에도 불자들 간에 봉축 카드에 덕담을 적어 보내곤 했는데 남편이, 언제나 늦게 와서 쓰윽~! 어정쩡하게 바라보던 그 선배가 얼마나 못마땅하던지, 매번 그만 쏙 빼놓고 회원들에게 연하장과 봉축카드를 보낼 정도였다.

 

어쨌거나 한 번씩 건네는 인사조차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때문에 남편이 인사를 건네면 까칠하게 그냥 고개만 까딱하며 받았다. 결혼을 한 후 나중에 이에 대해 물어봤더니 다른 후배들은 대선배라고 먼저 인사하고 챙기는데, 선배 대접은커녕 인사조차 먼저 건네지 않는, 시종일관 까칠한 나를 처음에는 '어디 저런 못된 후배가 있나?' 괘씸하기 짝이 없었단다. 그래서 '저 자신만만함이 대체 어디서 나오나?' 궁금해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나?

 

청소년기부터 출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왔던 터라 당시 힘들게 들어간 대학에 대한 회의가 많았다. 때문에 "출가는 출가고 대학만큼은 마치고"라는 몇 분 스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과 한마디 상의 없이 때려치우고 말았다. 그리고 청소년기부터 삶의 가장 가치 있는 길이라 생각해 온 출가수행자의 길을 걷고자 생활을 그에 맞추고 있었다.

 

내 계획을, 자신에 대한 까칠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어느 날부터 일방적으로 건네던 인사에서 한발 더 불쑥 다가와 음악 테이프이나 책을 건네며 "들어 봐라", "읽어 봐라", "주말에 00산에 가자", "모처 절에 가자" 사람 참 귀찮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일언지하, 받는 족족 딱딱 거절했다. 

 

"2년 넘게 짝사랑했는데, 출가는 절대 안 돼"

 

도시는 온통 여름의 열기로 뜨거웠다. 11월이면 나는 떠나리라. 염두에 뒀던 터라 차츰차츰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7월 어느 날(아마도 7월 19일)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그 선배가 어떻게 회사를 알았는지 퇴근 시간 직전 회사로 찾아 왔다. 그날 처음으로 얼떨결에 밥을 함께 먹었고 대충 어디쯤 사는지 알게 되었다. 

 

이는 시작이었다. 선배는 매일 아침마다 500ml 우유 하나와 초콜릿을 사들고 회사 건물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건네주고 돌아섰고, 퇴근 30분 전이나 한두 시간 전에 나타나 '함께 저녁'을 제의하곤 했다. 그리고 매일 집에까지 2시간 넘는 거리를 차로 데려다 준 다음 묵묵하게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어쨌거나 그동안 나름 많이 친해졌다.

 

"2년 넘게 짝사랑 해왔노라. 출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걸 00에게 우연찮게 듣고 난 이 후 세상이 깜깜했노라. 그래도 출가를 하겠다면 끝까지 따라가 여차하면 함께 출가하리라 마음  먹었었노라. 같은 불자로서 가고 싶어 하는 길을 발원해 줄까(보내줄까) 그냥 꽉 붙들까. 고민 많이 했노라. 그런데 이제는 절대 못 보내겠다. 결혼해 달라."

 

남편은 어느 날 진지하게 그간의 심중을 털어놓으며 청혼을 했다. 남편 왈, 이미 두 해 전에 궁합까지 다 봤는데 썩 좋다나. 그 점쟁이 왈, 놓치면 당신 죽는다는 각오로 절대 놓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나?

 

출가도 인연이 닿아야 할 수 있음을 온 몸으로 실감했다. 남편이 적극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하기 직전부터 자주 다니던 절과 스님과 부처님이 너무나 멀리에 있어, 바로 코앞인데 한 발짝도 뗄 수 없어 너무 막막하고, 그게 너무 서러워 펑펑 울다 깨어나는 똑같은 꿈을 되풀이 꾸곤 했다. 결국 나는 대답을 해주기로 한 날짜에 결혼을 약속했다.

 

우여곡절 많은 결혼생활, 괜히 한 건가 싶을 때도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남편은 그때 어머니도 잘 아는 두 처자와 선을 봤었단다. 그 처자들이 좋아했지만 남편이 거절했다나. 시어머니는 조건 좋은 그 처자들을 외면하고 어디서 까무잡잡하고 작달만한 나를 며느리감이라 데려온 남편과 의절하겠다면서까지 결혼을 반대했었단다. 그 처자들 놓친 것이 그렇게 아까우셨나? 지금도 가끔 하얗고 키도 말쑥하게 큰 그 처자들 이야길 할 때도 있다.

 

남편과 친정엘 갔다. 언젠가 한번은 내가 부부의 연을 맺어야만 하는 인연이란 생각 때문에 결혼을 약속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오랜 동안 계획했다가 현생의 인연이 아니라고 놓아야만 하는 출가에 대한 미련을 아직 다 털어내지 못한 상태였다. 현명한 선택인지 자신도 없었다. 때문에 친정 부모님이 은근히 결혼을 반대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절에 꼼짝없이 딸을 빼앗길 판이라 몇 년 동안 노심초사했던 친정아버지는, 몇 년 동안 연락을 끊어 죽은 자식으로까지 여겼던 딸이 결혼할 사람까지 데리고 나타나자 반색을 하셨다. 그리고 결혼 약속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고 있는 내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우리가 서울로 돌아온 며칠 지나지 않아 일사천리로 혼인신고를 해버리는 것으로 나를 옴짝달싹 못하도록 세속에 꽉 붙들어 앉혀놓고 말았다. 그렇게 우린 부부가 됐다.

 

"당신 부부의 사랑에 대해 써 달라"는 전화를 받고 모처럼 잊고 살아온 지난 세월들을 되돌아본다. 두 번의 화재와 죽기 직전까지 갔던 교통사고, 그리고 잦은 사업 실패로 달콤했던 날들보다 아픈 날들이, 잃어버린 것들을 어떻게든지 만회해 보려고 전전긍긍했던 날들이, 턱없이 부족한 돈에 매이고 쪼들린 날들이 더 많은 결혼 생활이었다.

 

워낙 반대했던 결혼이라 어머니는 큰 일이 터질 때마다 나를 탓하곤 했다. 친정어머니는 친정어머니대로 결혼과 동시에 교통사고며 화재 등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숨 돌릴 만하면 터지곤 하니까 '하지 말아야 할 결혼을 한 것 아닌가' 싶어 용하다는 점쟁이만 있으면 한달음에 달려가 우리 부부의 운을 점치곤 했다.

 

나도 지난날의 선택을 후회하며 '이혼하자' 여러 차례 마음먹었었다. 그때마다 나를 붙들었던 것은 딸이 평범한 사람으로 행복하게 살길 그토록 원하며 사윗감을 선본 지 불과 일주일 만에 혼인신고를 해버린 친정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간 힘든 일을 이겨내며 보고 느꼈던 남편에 대한 신뢰와 강한 생활력이었다.

 

"빨리 뽀뽀해 줘"...남편 애교 맛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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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5일 조카 결혼식장에서 남편과 아이들
ⓒ 김현자
icon_tag.gif중년의 사랑

거듭된 악재에 몇 년째 계속되는 경제 불황에 사춘기 아이 둘을 뒷바라지해야 하는지라 우리 부부는 갈수록 경제적으로 더욱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적은 자본으로 자영업을 하는 남편은 몇 년째 고전중이다. 남편이 버는 돈 거의 전부는 나라경제까지 곤두박질 쳐버린 상황에 화재라는 큰일까지 겪다보니 어쩔 수 없이 지게 된 빚을 갚는데 들어가고 몇 년째 생활은 거의 내가 책임지고 있다. 이러니 오죽 옹색하랴.

 

언젠가 뉴스에 보니 가정 경제 파탄이 부부의 이혼에 크게 작용한단다. 맞는 것 같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부부 역시 돈 때문에 가장 많이 싸운 것 같다. 하지만 돈 때문에 이혼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지금 비록 이룬 것은 거의 없지만 그 돈을 벌고자 지난날 남편이 어지간히 고생한 것을, 투잡까지 서슴지 않던(는) 남편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노력들을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남편과 싸운 후 속상할 때마다 웃기게도 남편이 징그럽도록 고생한 날들만 쏙쏙 떠오르곤 했다. 남편이 젊은 날 꿈꾸었던 것만큼 이루지 못해도 어깨를 활짝 펼 수 있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누가 좀 더 고생하고 누가 좀 더 벌면 어떠리. 살림하랴. 돈 벌랴. 힘든 날이 많지만 이렇게라도 남편의 어깨를 누르는 짐을 덜어줄 수 있어 다행이다.      

 

부부에게, 중년의 부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 믿음? 풍족한 돈? 아니 난 '서로에 대한 믿음'이 부부간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부부 빈털털이나 다를 바 없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만큼은 강하다고 자부한다. 그것도 힘든 상황들을 거듭 이겨내며 그만큼 단단해진 그런 믿음이라 어지간한 것으로는 절대 깨뜨릴 수 없는 그런.

 

어제는 작업이 많아 많이 힘들었단다. 오늘도 일이 많아 돈 좀 많이 벌었으면 좋겠단다. 그래? 그럼 뽀뽀해줄게. 힘내서 돈 좀 많이 벌어 오시지. 정신없이 나가려는 남편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만 깜박 잊은 채 몇 분이나 훌렁 지나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현관에 서 있던 남편 재촉한다. "빨리 뽀뽀해 줘. 빨리 나가봐야 해! 손님 오기로 했어!" 한편 참 귀여운 남편이다. 쪽~! 뽀뽀에 엉덩이까지 토닥거려줬다. 우리 부부 이런 맛에 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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