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유상종 대선배님 (목탁장군) 을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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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창호 작성일10-11-12 14:53 조회4,606회 댓글0건본문
안녕하세요. 우리 대불청에 자랑스런 선배님들이 많이들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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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불교부 창립, 육 해 공군 3군 사관학교 합동 법회 최초 실시, 군승파견을 가장 먼저 공개적으로 주장, 현역 장교 신분으로 대한불교청년회 상근부회장 맡고 불교정화운동 참여…. 유상종(劉相鍾, 82) 예비역 장군의 젊을 적 간략한 이력이다. 짧은 그의 이력이 보여주듯 유상종 장군의 삶은 곧 한국불교 군 포교 역사다. 그 중에서도 군 포교 불모지 시절이던, 1968년 군승 파견 직전 까지 유상종 장군은 불교 군 포교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 불심이 한평생 ‘군포교 매진’의 힘”
군승제 도입 최초 주장 등 군포교사 ‘산증인’ 가는 곳마다 불교발전 큰 공…‘목탁장군’명성 팔순 불구 ‘성불회’맹활약…“난 여전히 현역”
‘목탁장군’ 유상종 예비역 장성을 지난해 12월10일 대구에서 만났다. 곧 여든이지만 그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와 또렷한 말투를 잃지 않았다. 청년 장교의 면모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 2008년은 군승을 파견한 지 40년이 되는, 한국군포교사에 있어 가장 뜻 깊은 해였다. 한국불교 군 포교 역사는 유상종 대위를 공개석상에서 최초로 군승파견 당위성을 제기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사진설명 : ‘목탁장군’으로 불리는 유상종 예비역 장군은 1952년 육사불교부를 창설하고 60년 현역장교 신분으로 군승제도 도입을 처음으로 공개 주장한, 한국불교 군포교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로 꼽힌다. 대구 2작전사령부 무열사에서 군복무 당시를 회상하는 유장군. 육해공군에서 참석한 생도는 모두 200여명에 달했다. 이 모임을 주도하고 개최한 주인공이 유상종 당시 육사 불교부 고문장교(당시 대위)였다. 1952년 정규 4년제 두 번째 기수인 12기로 입교한 유상종은 입학 첫 날부터 기독교의 공세에 직면해야했다. 그는 제주농고 시절 제주불교학생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청소년 시절부터 불심이 돈독한 학생이었다. 육사 내에 기독교부는 있었지만 불교부는 없었다. 하늘 같은 선배의 강요에 모두 입 다물고 조용히 따를 때 단 한사람만이 문제를 제기했다. 바로 유상종 생도였다. 그는 아직 전쟁중이던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을 거론하며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이어 불교신자로 알려진 당시 노태우 중대선임과 전두환 구대장 등 선배와 교수들을 찾아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해서 불교신자라고 자신을 밝힌 6명의 1학년 생도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중에는 나중에 참모총장을 지낸 박희도씨와 이석복 전 5사단장, 선윤희 전 헌병감 등 지금까지 예비역불자 장성들의 신행모임인 성불회 활동을 하는 도반들이 포함돼 있었다. 2년 뒤인 54년 유상종 생도가 3학년이 되었을 때 그는 최초의 사관학교 불교부가 되는 육사불교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생도를 맡았다. 부처님의 인연이 닿았는지 그는 임관 후에도 육사 훈육관을 맡게 되는데 육사불교부 고문장교를 맡아 불교부를 반석에 올려 놓는다. 당시 불교신문은 그의 주장을 이렇게 전했다. “지금 군대 내에는 군종부란 기구가 있어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는 실무자를 파견하고 있으나 유독 불교계에서는 6.25 동란시 종군포교사회가 있다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는데 군인들의 요망이 군내에 포교사를 시급히 보내주기를 바라고 있다” 육사불교부 고문장교로 활동하면서 그는 불교 정화운동을 돕고 전국신도회 조직부장으로 총무원장 청담스님과 박충식 신도회장을 수행, 부산 대구 대전 청주 강릉을 돌며 신도회의 전국조직 결성에 나섰다. 현역 군인 신분으로 전무후무한 일을 한 셈이다.
군승이 파견 된 이듬해인 1969년부터는 당시 정승화 중장 주도로 불교장교회 결성이 줄을 이었다. 그는 국방부 특검단, 1군사령부 정보처, 2군단 군수참모로 보직을 바꿀 때 마다 장교회 결성을 주도한다. 그의 군내에서 불교 포교는 83년 제70사단장을 끝으로 전역할 때 까지 쉼 없이 이어졌다. 사진설명 : 그는 현역장교 신분으로 전국신도회 간부를 맡아 불교발전에도 기여를 했다. 1960년대 초반 신도회 간부 시절 한글 대장경 편찬위원 연석회의에 참가할 때 모습. 정면 제복차림이 유장군이다. 5관구 참모장 시절에는 미 헬기의 협조를 얻어 해발 500m 에 위치한 경주 오봉산 복두암의 관세음 석상을 건립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불상 4톤, 연화대 좌대 각 3톤에 이르는 관세음석상을 산 정상으로 끌어올릴 기구가 당시 한국군에는 없었다. 유장군은 미군 측에는 통신시설을 설치한다며 나무 박스에 불상을 담아 장비를 이송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2군사령부 근무시절에는 군법당 무열사 내에 법우의 집을 건립했으며 구미 금오산 약사암 종각 및 통일의 종 주조를 지원하고 70사단장 시절에는 군법당 와룡정사와 화랑정사를 건립했다. 그가 군인신분으로 군포교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63년 6사단 수색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만난 장병들과 지금도 모임을 만들어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장병들이 중대장을 못 잊어 40년이 넘도록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인간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74년 상승부대장 근무시절에는 팔각정을 건립해 군장병과 주민들의 쉼터를 마련하는 목민관(牧民官)의 모범을 보였다. 당시 은혜를 못 잊어 30년이 지난 2007년 주민들이 공덕비를 세웠다. 이처럼 한평생을 불교를 위해 헌신한 정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는 “어릴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던 그 인연이 평생을 이어온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님은 어린 저를 늘 절에 데리고 다녔으며 그 때 다진 불심으로 고등학교 때는 불교학생회를 만들게 됐으며 이후 육사와 군 생활로 이어지면서 더 다져졌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도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불교 일에 열심이다. 88년 예비역 불자 장성들의 모임 성불회를 창설하고 총무국장을 역임했던 그는 지금도 여전히 성불회의 주역이다. 그의 좌우명 ‘성심유도(誠心有道)’처럼 그는 오늘도 모든 일에 열과 성을 다하며 영원한 청년 장교로 살고 있다. 2009 .1. 10 불교신문 기사 발췌.... 유 상 종(劉 相 鍾 ) 법명:금강(金剛) 생년월일:1931.10.07 출생지:제주 학력:1956 육군 사관학교 졸업 경력:1984 육군 준장 예편 상훈:대통령표창 저서:긍지와 전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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