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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나의 노래(능인선원과 인연 그리고 발전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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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만 작성일15-09-16 16:01 조회7,536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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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나의 노래(능인선원과 인연 그리고 발전상...)-4

군에서 재대 신고를 하고서 군 문을 나설때의 마음은 섭섭합과 아쉬움 그리고 사회에서 무엇이든지 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 받을때 돌아가신 아버님의 임종을 지커보지 못한 불효자,늘 죄송하게 생각하며 시골에 계신 어머님께 재대 인사를 드리고 아버님의 묘소에 들려서 술 잔을 올리며 꼭 아버님께 못다한 효도를 어머님께 하겠다고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다짐을 하였다.

84년 7월에 재대를 하여 그해 9월에 "대한교과서(주)"에 입사를 하여 사무실이 강남의 말죽거리여서 인근에 집을 구하고서 주변의 포교당을 찾으니 성열 스님이
운영하시는"강남포교원"과 칠보사 석주 큰스님이 상좌들에게 맏겨서 운영하시는 "칠보사 포교원"그리고 지광 스님이 운영하시는 "능인선원"이 있었다.
하여서 다녀보니 나와 인연 인듯한 곳으로 능인선원을 다니기로 하였다.

그당시 능인선원은 서초동 무지개 아파트앞 2층 건물의 2층에서 이제 법당 문을 연지 2달 가량된 약 50평 가량의 포교당이였다.

회사에서 끝나면 능인선원에 들려서 이제 생긴 포교당 이다보니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공간이 너무나 많았다.
하여서 그동안 불교 학생회와 청년회 그리고 군에서 배우고 읶힌 불교 생활 전반적인 부분을 몸을 아끼지 않고 하면서 벽에 불교 사진 등을 거는 등의 일을 하다가 쓰는 망치의 파편이 눈에 2번이나 박혀서 수술도 하는등 어느 때는 밤을 세우고서도 도와 드렸다.

특히 약간의 손재주가 있어서 법당의 장엄적인 부분에 거의 도맏아서 하였다.

법당 천장에 설치된 연등의 제작 그리고 법회를 알리기 위하여 설치하는 프랑카드 등등 지금은 프랑카드를 관할 구청에 신고후 설치가 가능하는데 그당시는 신고없이
설치가 가능하여 능인선원 기사분과 같이 육교 밑과 거리마다 설치도 하고,시간만 되며는 능인선원에 가서 선원의 잡다한 일들을 도와 드리니 지광 스님께서 앞으로 능인선원의 계획등을 말씀하시면서 사람의 손이 필요하니 능인선원에서 기거하면서 직장에 다니면 어떻겠나구 하시기에 집을 정리하고서 능인선원으로 옮기는 계기가 되였다.

스님은 포교적인 열정이 대단하시어서 매주 일요법회와 각종 기도법회 사시기도 새벽기도 그리고 매주 신문의 간지로 주변의 몇군대 신문사에 연락을 하여 능인선원
주보를 보내고,우리나라에서 법력이 높으신 큰스님을 거의 1달에 3번 정도는 초청을 하여서 초청 법회를 하였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은 스님이 직접 꼭 법회를
주관하시면서 해박한 불교적인 교리를 현실적으로 잘 풀어서 싶게 전하시고 유창한 영어로도 가끔 설법에 섞어서 표현을 하니 강남의 지식층의 불자들에게 아주 좋게 표현이 되었으리라 생각되였다.

관세음보살의 정근의 부분도 우리나라 국악의 오음과 관세음보살의 소리가 오음이라서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며는 저절로 염불 속에서 단전 호흡이 되어서 염불선이 된다는 설법은 그당시 광장히 새롭게 피부로 와 닿는 기도법이라고 생각 되였다.

그리고 각종 광고 매체를 통하여 초청 법회 행사를 알리고 하니 주변에 다른 사찰에 다니고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진 불자들이 한분 두분 모이더니 개원후 거의 2~3달 만에 자연히 능인선원의 신도가 되어서
능인선원에 오시는 신도님들이 법당은 말할것도 없고
법당을 올라오는 개단에서 부터 건물 주변에 꽉 찰 정도로 법비에 목말라하는 신도들로 가득하였다.

그러기를 2달 가량 되니 기독교 개신교 계에서 비상이 걸렸다.

몇칠후 기독교 단체에서 아예 능인선원이 있는 건물을 통체로 사버린 것이다.

갑자기 내몰리는 상황에서 신도님 들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권선을 하니신도님들은 너나 할것 없이 서로 큰 마음을 내어서 얼마후에 강남역 부근의 삼익상가
4층으로 옮기는 계기가 되였다.

그당시 상익상가 4층의 능인선원 법당은 80 평으로 사는데 1억이 필요하였는데 서초동의 한 노보살님이 1억을 쾌척하시구,또 다른 분이 능인선원의 대형 뻐스
한대를 바로 시주하시는등 많은 분등이 권선에 동참하시였다.

나중에는 바로 옆에 20평 짜리 개척 교회가 있었는데 그것마저 사들여서 100평의 공간으로 법당이 이루워졌다.

교회에서 건물을 사는 통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셈이다.

그당시 능인선원에 오시는 신도들의 층은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층의 신도 분들이많아서 그당시 군 장성의 별을 세워보니 13개나 되였다.

하루는 신도들과 법당에서 연등을 만들고 있는데 사복 차림의 군에서 사령관님 1호차 운전병을 법당에서 만나기도 하였는데 무슨일로 왔냐구하니 저기 않아계시는 보살님이 사령관님의 사모님 이시라는 것이다.

아무튼 신도님들의 층이 높아서 보살님들도 거의가 대졸자라서,2류 대학을 나온 분들은 그야말로 명함도 못 내어놓고,불교에 대한 공부 의지가 정말 대단하였다.

경에 커다란 원력을 새운 사람이 커다란 원과 신심으로 불교를 이끄며는 불보살님 께서 거기에 맞는 인연들을 보네 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지광 스님에게는 있으신것 같았고 확인 할수 있었다.

매주 발행되는 주보에는 교리,경전 해석등과 더불어 신도님이 운영하는 사업 소개와 더불어 신입 신도들을 모두 소개하는 공간과 더불어 각종 법회 알림등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신도 관리 에서는 구단위로 지역을 나누워서 각 지역의 장들이 그지역의 신도를 관리 하겠금하고 지역 법회를 통한여 각 가정에서 법회를 볼 수 있는 가정
법회도 병행 하시였다.

그리고 초청법회와 더불어 수계법회도 하셨는데 지금의 지광스님의 법명도 서경보 스님을 초청하여 수계법회를 하시면서 다른 법명에서 다시 스님도 받으셨다.

또한 신도들로 하여금 여의도 순복음 교회등에 교회 신도로 파견하여서 잘 되어가는 교회의 전도 방법을 배워 오겠금하고,스님 또한 유명하신 스님이 어느 것에서 법회를 하신다하면 바로 가시어서 설법하시는 스님의 설법 방법을 파악하시구 법회가 잘
되는 방법을 배우시는 등의 포교에 대한 노력을 그야말로 포교를 포교 전략으로 생각하시어 능인선원에 적용하시였기에 오늘의 능인선원이 가능 하였으리라 생각한다.

한번은 송광사 서울 포교당 삼청동 입구의 "법련사"에서 법정 스님이 설법을 하시러 오셨는데 저는 그당시 법련사 불일회보 주간으로 계시는 송광사 구산 스님의 상좌이시고 지금은 전남 보성의 "대원사"의 주지 스님으로 생활 포교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시는 현장스님과 속가의 같은 동향으로 군 시절인 82년도에 해인사를 들렸더니 현장 스님은 해인사의 해인지를 맏아서 발간하시고 계시였고 문서 포교에 남다른 열의를 보이시던 분이라 해인 강원 졸업후에도 불일회보를 송광사 지묵스님과 함께 이끌어 가고 계시였던 터라서
자주 법련사를 들려서 불교 관련 출판물을 직장의 영업적인 차원에서도 수주를 하여 보고, 또한 스님을 도아 드릴려구 자주 들렸는데 그날도 법정스님의 설법을 들으려고 능인선원 일요법회가 끝나자 바로 법련사에 들렸더니 바로 능인선원의 지광스님이 모자를 푹
쓰시고 법정 스님의 설법을 들으러 직접 오신 것이였다.
그러한 열정에 그저 감탄을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님 혼자서 여러 부분을 하시기에는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 스님은 3~4명 분의 목을 하시는 체력도 정말 대단하시어 불보살님의 가피속에서 가능한
일들이라 생각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매일 함께 새벽 법회를 보다가 저의 기도하는 부분을 인정하셨는지 새벽 기도는 스님이 여러가지로 어려우시니 저보고 집전을 하시라고 하시어서 새벽 기도는 제가 맏아서 하고,사시 기도는 스님이 꼭 신심이 우러나겠금 하시였다.

그당시에 제가 새벽 기도를 집전하여도 함께 따라주신 보살님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새벽 기도에 오시는 보살님들은 우리나라 대기업의 회장 사모님,혹은 어머님이 많으셨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직접 운전을 하고서 새벽 기도를 위하여 삼익상가의 법당을 찾으셨다.

그러한 신심이 있으시기에 그분들이 부처님의 가피가 그야말로 넘쳐서 잘 사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특히 기도를 하실때 매월 1~3일간의 신중기도는 꼭 하시였고 보통 기도 시에도 주존불을 관세음보살님을 모신 관계로 관음 정근을 포함하여 모든 정근을 30~40분은 정말 힘있는 정근으로 하시였으며 특히 신중기도에 아주 강한 믿음를 보이시어 신중님들의
가피를 늘 생각하고 믿어 의심치 않으신 듯 하였다.
그리고 신도님들의 영가 기도 또한 한분 한분 지극 정성으로 하시어서 믿음을 주시였다.

그리고 틈틈이 자연스럽게 능인선원에 필요한 각종 모임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웠는데 제가 고등학교때 "화랑단"이라는 불교 학생회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하였더니 바로 실천으로 옮기시어 지금의 능인선원 중고등부의"화랑단"이 탄생하였지 않나 생각된다.
스님은 불교 포교의 현실적인 감각이 아주 정말 타고 나신 듯 하였다.

그리고 방생법회와 순례법회도 꼭 1달에 1번 정도는 가져시어 신도들의 유대강화를 자연스럽게 이끄시였다.
그리고 불교대학을 3개월 과정으로 개설하시어 법비에 목말라 하시는 강남 지역의 불자님 들을 능인선원으로 힘을 모으는 계기로 삼으셨다.

그리고 불교 법회시에는 가능한 신도들에게 와 닿겠금 반야심경을 한글화 하시고 "염송문"이라는 부분을 넣어서 한줄은 법사인 스님이 선창을 하며는 다음 줄은 신도들이 선창한 부분에 맞게 후렴 식으로 따라서 하였는데 신도들과 스님과의 관계및 전체적으로
법회에 함께 한다는 의식을 심어 주기에는 아주 좋은 불교 의식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끝임없는 기도속에서 능인선원이 신도들 모두의 공간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시는 듯 하였다.

그래서 기도 법회와 더불어 부처님의 환희심을 심어 주시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부처님 법을 공부할수 있도록 능인선원 신도 한평 사기 운동을 전계하시면서 또한 각 각의 신도들이 부처님을 한분씩 모시는 부처님 만불 모시기 운동을 하시였다.

부처님 모시기는 그당시에 한분을 모시는데 20만원 이였는데 부처님을 모시는 공덕과 더불어 20 만원중 많은 부분은 지금의 서초동 능인선원을 건립하는데 커다란 힘을 작용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스님은 자신감으로써 포교를 하셨고 강남의 현실적인 신도들의 상태를 파악하시어 늘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법회와 불사에 참여하겠금 하시는것 같았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자주 들린 법련사에서 현장 스님이 합천 해인사에 해인사 포교국 소속의 불교 서적과 용품점을 해탈문 바로 옆에 개설을 하였는데 초대 책임자로 갈 생각이 없냐구 하시기에 몇 칠간 생각하다가 스님들의 세계도 알겸 수행 공덕도 될 듯 하여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서 스님께 말씀 드리고 해인사로 향했다.

- 계속 -
念佛行者 甫剛合掌

출처:
나의 노래(능인선원과 인연 그리고 발전상...)-4 - 보강거사 수행시심 -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http://cafe.daum.net/vajra/2qli/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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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영만님의 댓글

김영만 작성일

능인선원과 인연(약사여래불 점안식을 보면서...)

요즘 세계최대 능인선원 서울 약사여래불 점안식 관련하여 정치인 등 많은 분의 관심이 있네요.

많은 이들이 심신이 병고에 시달리는 시절에 모든 생명의 심신의 병고를 치유하여 주신다는 약사여래불, 능인선원 이야기가 나오니 예전 인연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네요.

84년~85년 거의 1년 넘게 제가 초창기 능인선원
새벽 기도 부전을 유발의 상태로 직접 집전했습니다.

지광 스님이 처음에는 새벽 기도 집전을 하시다가 당시 군법당 군종병으로 제대를 제가 하여서 매일 새벽 기도를 군승이 없는 법당에서 하여서 의식하여 왔는데 지광 스님이 저의 염불 집전 모습을 보시고서 저에게 부탁하시었습니다.

당시 군 제대 후 첫 직장인 강남 대한교과서 본사가 말죽거리에 있어서 근처 성열 스님의 강남포교원, 석주 큰스님의 칠보사 강남포교당, 지광 스님(속명: 이정섭)의 능인선원을 찾아가니 저의 불교적 방향과 너무나 흡사하여 능인선원과 인연이 되었습니다.

능인선원 포교당 실내 장식 등 잡다한 일을 무보시로 하다가 눈을 다쳐서 수술을 두 번 하면서도 오릇히 신심 하나로 임했던 능인선원입니다.
능인선원과 인연은 기회가 된다면 한번 이야기 할까 합니다.
저의 확실한 불교적 방향은 재가자의 수행 도량이
많이 생겨야 한다는 생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능인선원 처음 서초동 무지개 아파트 앞 2층 상가 약 40평에서 시작했고 다시 강남역 근처 삼익 상가 4층 100평가량의 법당으로 옮긴 후 1평 사기 운동으로 불사를 시작하여 현재의 포이동 능인선원으로 옮겼습니다.

저도 무지개 아파트 앞 상가 건물에서 삼익상가 건물 법당 시절까지 함께 동참했었는데 감회가 새롭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 약사여래불 서울에 조성
http://v.media.daum.net/v/20150914174907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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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래(능인선원과 인연 그리고 발전상...)-4 - 보강거사 수행시심 -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http://cafe.daum.net/vajra/2qli/63

양승찬님의 댓글

양승찬 작성일

김법사는 ...훌룽타

김영만님의 댓글

김영만 댓글의 댓글 작성일

선배님 반갑습니다.
부족함을 알기에 정진하고자 합니다.
법체 건안하시고 늘 법희로움 가득하소서.
선배님과 한번 신명나게 철야 고성염불을
하여야하는데 잘 안되네요.
귀명본각심법신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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