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을때 내는 용기가 진정한 청년불자 정신입니다. (이영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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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앙사무국 작성일11-04-19 16:17 조회4,275회 댓글0건본문
4.16 ~4.17일 전국임원전진대회때 제 30차 전국불교청년대회 원만성사를 위한 제안과 발원시간때 발표되었던 내용입니다.
늦었을때 내는 용기가 진정한 청년불자 정신입니다.
대한불교청년회
문화예술지원단장 이영빈
안녕하십니까? 관무용단에 이영빈입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의미 있는 자리에서 저에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회장님께서 저에게 발언권을 주신 이유는 '대한불교청년회'라는 이름에 담긴 '청년'의 나이를 제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회장님의 뜻을 감사하게 받으며 실제로 젊은 청년불자로서 제가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 우리 불교계의 청년불자 실태입니다.
청년불자라는 말은 과연 이 시대에 몇 명이 되는 젊은이들에게 붙을 수 있을까요?
제가 하는 운영하는 사업 중에는 관무용단 외에 카페와 베이커리 등이 있습니다. 두 곳 모두 나이든 분들보다는 '젊은 고객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인만큼 직원들과 아르바이트생들은 젊은 사람들로 채용하고 있습니다. 한번 제가 1년 동안 오고가는 직원들과 아르바이트생들을 세어보니 대략 100명 정도였습니다. 그들 중 청년불자들은 몇 명이 있었을까요?
5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에는 면접을 보러 온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불자가 없던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에 대한 태도입니다. 기독교 신자인 경우, 종교를 물어보면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기독교'라고 대답합니다. 반면 불자인 경우, 종교를 물어보면 조금은 경계하는 눈으로 왜 종교를 물어보느냐고 먼저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압니다. 아, 이 사람이 불자이구나. 하고. 그 이유를 아십니까?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기업이나 사업, 기독교 신자가 운영하는 기업이나 사업의 경우, 아주 당연하게 오직 기독교인들로만 직원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채용해도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을 정도로 많은 젊은 신자들과 인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취업을 눈 앞에 둔 젊은이들은 물론 젊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하나의 힘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생계를 위해 직장을 선택한 젊은이들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기독교 신자가 되기도 합니다. '직장'이라는 구조에서 강력하게 권고를 하는데 아무리 종교에 대한 특히 불교에 대한 편견이 없다 하더라도 '직원'이 자신의 신념을 '생계와 직결된 월급'과 맞바꾸어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 불교계는 자비를 부르짖지만 불교청년의 인프라가 너무 작아 타 종교인을 쓸 수 받게 없는 상황이 이루 워 지며, 점점 세대가 내려갈수록 그 힘이 너무 작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노보살님들이 이끌어온 불교세대가 끝나면, 그다음 세대의 일은 미리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지금도 그런 예비 징조들이 너무나 확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학교에서 자행되는 예배와 공공기관인 동사무소에서 선교무용을 가르치고 있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두 번째. 청년 불자의 인프라에 관한 문제점입니다.
불자가정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이 불자여도 자식들은 타 종교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청소년들과 아이들을 갈 곳이 없습니다.
어린이 불교가 중요하지 않은 것 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억해보십시오.
가족의 울타리가 절대적이었던 어릴시적의 일은 누구나 가물가물합니다. 중요한 것은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사회를 접하게 되는 '학교'입니다.
기독교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실행하는 다양한 문화와 활동적인 사교모임은 군중심리에 이끌리기 쉽고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중고등학생들을 자석처럼 끌어 모읍니다. 불자가정에서 성장했던 많은 청소년들이 '사춘기'라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면서 자신을 기꺼이 받아주는 '착하고 적극적인 멋진 친구들'이 있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너무나 흔합니다.
갈 곳 없고,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기독교는 너무나 너른 품과 아량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주고, 그들이 모이면 칭찬을 해주고, 재미있는 문화생활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주며 하나님의 말씀과 정신을 자연스럽게 접하도록 가르칩니다. 우리 불교에서 매번 젊은 사람들이 없다고 안타까워만 하는 동안에 기독교에서 실천한 접근 방식입니다. 너무나 영리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 인프라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이어지고,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가서도 계속 이어지며 그 안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모습 또한 흔하디 흔한 일입니다. 그 아이들의 아이들은 당연히 모태신앙으로 기독교를 접합니다. 그리고 그 끈은 불교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러는 동안 불교계의 청년불자 인프라는 마치 전설 속 이야기처럼 행방불명 되어버렸습니다.
세 번째 불교가 문화라는 개념이 희박합니다.
제가 외국공연을 가면 이렇게 말합니다. 아시아에서 공연을 초청하는 이유는 불교적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기 때문인데 너희들은 불교의 춤을 가지고 오지 않는 다고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외국공연에서 무술로 잘 알려진 소림사처럼 불교에 파생된 많은 소스들과 함께 고유의 문화를 잘 혼합하여 이미 '문화'로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동양은 곧 불교라는 인식이 강하여 불교적 색채를 가진 공연을 훨씬 우아하고 훌륭하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불교의 색채보다는 '민속'에 그친 공연들을 많이 가지고 갑니다. 중국이나 일본 심지어 경제적으로 열악한 동남아시아의 국가에서도 '불교'를 컨텐츠로 하여 자신들이 단순히 가난한 국가가 아니라 수천년의 문화국력을 갖춘 나라라고 자국을 홍보하며 경쟁력을 기르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우리 나라는 불교의 역사를 전통이나 문화가 아닌 단순한 종교라는 시선으로 편파시켜 국내 뿐 아니라 세계무대에서도 잠재된 문화 국력을 억지로 깍 아 내리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불교를 전통이나 문화로 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전통을 지키고 알려야 하는 위치에 있는 당사자들조차 불교가 자기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당당히 말씀드립니다.
더 이상 종교의 편파 없이 한국의 전통인 불교로 문화컨텐츠를 이루어 내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의 문화 국력도 당연히 지금보다 낮아질 것 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술에 있어서 변화를 주도하는 선진국이 되었지만 국가를 대변할 수 있는 문화가 있는 문화 강국으로는 자리매김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이미 많이 늦었습니다. 하루 빨리 갈 곳 없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청년불자들의 인프라를 바로 우리가 구축해야 합니다. 중고등학생 들이 굳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 편하게 오고 갈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들이 정신과 마음을 치유하고 세상과 건강하게 소통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합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불법을 찾아오게 해야 합니다.
절이 들어가기 힘든 곳, 가봤더니 불편한 곳, 노보살님들이 좌복을 차지하고 앉아 알 수 없는 염불을 외고 있는 곳이 아니라 누구나 올 수 있고 오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스님들이 마냥 어렵고 뵙기 힘든 분들이 아니고 어떤 실수를 하면 안되는 분이 아니라 혼란을 겪으며 성장하는 젊은이들에게 기꺼이 지혜를 나눠주시는 소중한 멘토가 되어 합니다. 절이란 시대와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아픔과 고민을 함께하고 치유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법륜을 굴리셨을 때 나라의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출가를 하여 사회적인 문제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문제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젊은 불자들이 활기차게 활동할 수 있는 토대가 하루 빨리 마련되길 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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