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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야심경 ] 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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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9-11-16 13:56 조회3,618회 댓글0건

본문

Ⅰ. 반야심경의 개관
Ⅱ. 경의 제목

1장. 제경(諸經)의 제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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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마하(摩訶)

‘마하’는 범어로 ‘Maha’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마하는 범어의 ‘Maha’를 발음만 그대로 따온 것일 뿐,
한자로는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마하’의 뜻은,
‘크다, 많다, 뛰어나다’는 의미로서,
우리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의 크고 많다는 개념을
훨씬 초월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라든가, ‘엄청나게’, ‘무진장’등의 개념으로도
이 마하를 풀이하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 마하는 절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분별의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크고,
다른 것보다 많고, 상대보다 뛰어나다는 정도의 개념이 아니라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으로 크다는, 그리고 많다는 개념인 것입니다.

‘마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상대 세계의 분별심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를 보고 ‘아! 저 사람은 키가 크다’고 했을 때,
우리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의 키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170cm 정도? 혹은 180cm,
아니면 190cm 정도를 키가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딱히 어느 정도를 큰 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시절,
못 먹고 배고프던 시절의 큰 키의 기준과
지금처럼 잘 먹고 잘 사는 시절의 큰 키의 기준이
엄연히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정년 퇴임하신 대학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당신의 키가 164cm인데,
젊었을 때는 보통 정도의 키는 되었기 때문에
키에 대한 컴플렉스가 전혀 없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은 175cm의 키를 가지고도
보통 수준으로 인정받기가 힘들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키를 예로 들어보았는데,
이처럼 키가 크다고 했을 때 그 기준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항상 바뀌게 마련인 것입니다.
옛적의 기준과 지금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렇기만 할까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간에도
이런 상대적인 개념의 차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키가 큰 농구 선수들 사이에서는 180cm 정도의 키가 작은 키로 통할 것입니
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현재 우리 사회에서 180cm 정도면 꽤나 훤칠하고 큰 키가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가 ‘크다, 작다’ 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단지 상대적인 분별심일 뿐입니다.
누군가의 키가 176cm이라 했을 때,
180cm가 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작은 키이고,
170cm도 안 되는 작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제법 큰 사람으로 통할 것입니
다.

다시 말해, 우리가 '크다・작다'
혹은 '많다・적다', '뛰어나다・어리석다'라고 느끼는 등의 모든 분별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붙들고,
잘났다거나, 못났다거나, 혹은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등의
분별심을 내는 것은 무명(無明) 때문에 일어나는
어리석음의 과보(果報)일 뿐인 것입니다.

비슷한 다른 예로
젓가락을 가지고 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또한 전봇대라는 인연 앞에서는 짧게 되고,
이쑤시게라는 인연과 함께라면 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젓가락 그 자체만을 가지고 길다 짧다고 한다는 것은
잘못된 우리의 분별일 뿐,
본래자리에서는 그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인연따라 짧을수도 길수도 있을 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생겼다, 못생겼다는 분별
똑똑하다, 어리석다는 분별,
뚱뚱하다, 말랐다는 분별...
이 모든 분별들은 본래부터 있던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인연따라 분별하고 고정지어 놓고는
스스로 지어 놓은 고정관념에 빠져 괴로워하고 답답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보고 크다고 할 것이며,
무엇을 보고 작다고 하겠습니까?
이처럼 고정된 것이 없기에,
‘크다, 작다’ 라고 하는 인식의 극단을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분별은 단지 주위의 환경[인연]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일 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위의 인연 따라,
예컨대 작은 사람들 앞에서는 큰 사람도 되었다가
또 큰 사람들과의 인연 속에서는 작은 사람도 되고,
이렇게 일체와 함께 돌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 혼자 무인도에 살았다면,
‘내가 크다・작다, 잘났다・못났다, 똑똑하다・어리석다’라는
분별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 인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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